남의 이야기 좀 그만하세요
타인 흠집 내기에 집착하는 그녀의 이중성
1. 그녀가 나타났다.
'험담', '갑질', '군기'
그녀가 우리 팀으로 발령이 났다고 하자 앞다퉈 들려오던 무시무시한 수식어 들이었다. 그 세 단어로 나는 생애 첫 면접을 앞둔 취준생처럼 불안에 떨어야 했다.
"잘 부탁해요! 업무 적응이 끝나는 대로 제가 여러분들의 힘이 되어드릴게요!"
일본 드라마의 명량 캐릭터처럼 불끈 쥔 오른 주먹을 가슴높이로 치켜세운 그녀는 무성했던 루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직장 연륜에 비해 사무실로 걸려오는 업무 전화도 속삭이며 받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아 보였고 사소한 질문에 대답을 해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덕분에 큰 도움받고 있습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를 마침표로 달기도 했다. 리액션이 조금 과하기는 해도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 참 못됐지.. 그런 루머를 퍼뜨리냐..'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 관한 편견을 갖지 않기로 했다.
2. 그로부터 1년,
'은혜를 갚겠다'던 그녀의 호언장담은 아직까지 어떤 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전임자의 업무 인수인계서를 뒤적거리며 미제사건 속 범인을 추적하듯 더듬더듬 일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상당한 업무 실수로 부하, 상사를 막론하고 그녀의 업무까지 떠맡거나 그녀의 실수를 만회하느라 남모르게 진땀을 빼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반대로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들도 있다. 바로 그녀에 관한 무시무시한 3개의 수식어다.
3. 그녀의 이중성
그녀는 본인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본인 이야기가 화두에 오를지라면 다급하게 화제를 돌리려고 애쓸 정도다. 여기까지는 공과 사를 구분하고자 하는 개인의 신념일 수 있겠다 싶어 특별히 보탤 말이 없다. 문제는 그런 그녀가 남의 이야기 특히, 타인의 부정적인 단면에 대해서는 방언이 터진다는 데에 있다.
내가 관찰해 본 바로 그녀는 역대급 '부정적인 사고 필터' 보유자였다. 타인의 말과 행동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그녀의 필터를 거치는 순간 '억측'과 '왜곡'이 난무한 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이야기로 재생산되기 일쑤다. 입력값이 잘못되었으니 출력 값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이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손수 본인 입으로 전파한다는 데에 있다.
그녀가 쏟아내는 타인을 향한 날 선 비난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저 '본인이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 브런치 글 '직장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악마와 본질은 같은 듯하다)
최근에도 한 신입 직원이 그녀에게 "저희도 주간회의를 하면 자주 소통되고 좋겠어요"라고 정중하게 제안한 것을 두고 "관리자인 나한테 주간회의 왜 안 하냐고 따지던데? 나만 기분 나쁜 거야?"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시켜 첫 출근한 직원의 험담을 시작했다. 나도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30분째 듣다 보니 일일 칼로리 소모가 절로 된 듯 한 순간에 진이 쭈욱 빠졌다.
"나만 그래? 나만 기분 나쁜 거야?"라는 동감을 재촉하는 반복적인 물음표에 형식적인 리액션 목록이 소진되어 기어코 거친 말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의아한 것은 그녀의 말마따나 '관리자로서' 해당 발언이 분수도 모르는 신입의 월권이라고 느꼈다면 그 자리에서 '관리자로서' 분명하게 지적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앞에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에 수긍을 해놓고는(정작 발언 당사자는 그녀가 이야기를 매우 잘 들어줬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정작 뒤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4. 여자는 그녀의 적?
씁쓸한 대목은 비난의 대상이 대부분 그녀보다 '하급자', '여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는 건가?' 그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본인이 그들의 관리책임자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20대 사원의 사적인 취미까지도 도마 위에 올리곤 한다.
이렇다 보니 그녀와 마주치는 1분 1초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또 누구를 욕하려고...'라는 경계심으로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그녀를 물리칠 수 있다. 지리멸렬한 비난에 지쳐 잠시 영혼을 내려놓을지라면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 십상이다. 수 백번도 더 그런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미친 척 그만하라고 면박을 주고 싶지만 그 짧은 한 마디가 그녀라는 필터를 거쳐 백만 마디로 확산되어 있을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니 피하는 수밖에 없다.
5. 피하는 게 상책?
오랜 기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을 겪을 때가 부지기수이지만, 이런 유형은 또 처음이라 대처 매뉴얼이 없다. 그래서 적잖이 당황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미 그녀의 저급한 행태가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려 동료들끼리는 그녀가 누군가를 또 비난하려 들면 '긴급 화제 전환'이라는 젠틀한 방법으로 그녀의 입을 막기로 의기투합했다.
업무량이 폭증하는 연말에 이런 쓸데없는 일로 큰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맞서 싸우자니 그 사안이 너무도 치졸해서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그녀가 다음 인사이동에 다른 부서로 긴급 발령이 나기를, 그녀와 있는 동안에 내가 그녀의 주적이 되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람... 이 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