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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석습(朝花夕拾)

여유의 행복

by 문용대

조화석습(朝花夕拾)

‘조화석습(朝花夕拾)’은 중국 작가 노신의 산문집 제목에서 비롯된 말로, 직역하면 아침에 핀 꽃을 저녁에 주워 담는다는 뜻이다. 젊은 날의 기억과 지난 인생을 되새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나는 이 말이 단순한 회상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화석습은 느림의 미학이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는 과정이다. 아침의 꽃이 저녁에야 비로소 손에 들어오듯 인생의 아름다움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보인다.


여유에는 마음의 여유와 물질적 여유가 있다. 이 둘은 닮았지만 다르다. 물질적 여유는 외적인 공간에서 비롯되지만 마음의 여유는 내면의 공간에서 자란다. 몸은 외적 공간의 영향을 받을지라도 마음의 공간만큼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공간은 채워지면 작아지고 비워야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유를 비워진 마음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그 공간이 넉넉할수록 행동이 부드러워지고 행복이 스며든다.


나는 솔직히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성격이 급해서다. 타고난 것인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습관인지 모르겠다. 아내와 길을 걸을 때도 늘 앞서 간다. 밥도 누구보다 빨리 먹는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점심시간마다 일꾼들이 잠시라도 쉬기 위해 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던 모습을 보며 나도 어느새 몸에 뱄는지 모른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같다. 낚싯대 들고 고기가 미끼에 걸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나와는 맞지 않는다.


나는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잘 냈다. 남에게 지는 것도 싫었다. 길을 걸을 때도 앞사람을 추월해야 직성이 풀렸다. 운전 중 끼어드는 차를 그냥 두지 못했다. 지나고 나면 후회하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다. 전에 그랬다는 말이다. 일흔이 다 돼서야 그 성급함을 버리려고 많이 노력해 왔다. 그런 나와 오랜동안 살아준 아내가 참 고맙다. 밖에서 그랬으니 집안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언젠가 읽은 김수영의 시가 생각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이 시를 읽으며 이름 있는 시인도 자신이 얼마나 작은 일에 화를 내는지 돌아보았구나 싶었다. 그가 그랬듯 나도 늦게나마 개과천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래도 나의 급한 성격 덕에 약속은 어기는 법이 없다. 시간을 지키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에선 연로하신 부사장님이 계셨는데 회의가 시작되면 문을 잠가버리셨다. 나는 그런 분을 모실 때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규칙을 지키는 단호함 속에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나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난다. 그것도 아마 급한 성격 탓일 것이다. ‘아침 일찍’ 하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떠오른다. 그는 늘 새벽에 출근해 조회를 하며 “새도 부지런해야 좋은 먹이를 먹는다.”라고 말했다. 그가 존경한 인물이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였는데, 그 이유가 아침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란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일찍 하루를 여는 습관이라 하니, 그 점만큼은 나도 갖추었다 싶다. 그것만 따지자면 나도 성공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 부지런함이 꼭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전철을 탈 때마다 내리기 편한 칸, 갈아타기 쉬운 칸을 찾아 탔다. 그래야 몇 초라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일부러 세 번째 칸에 탔다. 앞쪽은 여느 때처럼 붐볐지만 내가 탄 쪽은 한산했다. 도착 후 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40초 차이였다. 그 40초의 여유가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여유는 큰 결심이 아니라 사소한 선택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잠깐의 느림이 마음을 이렇게 편하게 할 줄이야.


나는 그동안 쫓는 이도, 쫓아오는 이도 없었는데, 늘 쫓기듯 살아왔다.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밥을 천천히 먹고 약속 시간을 조금 늦게 잡는 여유도 가져야겠다. 가끔은 늦잠을 자는 습관도 나쁘지 않겠다. 그래야 마음이 쉬고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마음의 여유, 생각의 여유가 결국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노자의 말처럼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大器晩成)’고 했다. 조화석습이 바로 그 말과 통한다. 아침에 피어난 꽃을 저녁에 다시 주워 담듯, 인생의 아름다움은 느림 속에서 다시 피어난다. 또한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고사처럼 느리고 꾸준한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성숙한다. 삶은 서두름의 결과가 아니라, 여유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나의 하루도, 나의 인생도 그렇게 천천히 빚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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