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정치인이 삭발을 했다. 삭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1990년대 초까지 내가 일했던 직장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기술연구소 외국인 50여 명 중 일본인 마쯔꾸라(松倉)라는 기술자가 있었다. 그는 회사가 국내 최초로 컴퓨터 수치제어장치(CNC)의 국산화 개발에 성공하고, NC머시닝센터, NC선반 등 공작기계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가끔 삭발을 했다. 삭발한 것만 보아도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방위산업 장비인 구경(球徑) 20mm 발칸포 포신(砲身)의 내부 강선(鋼線)을 가공하기 위한 전용기(브로칭 머신 broaching machine)를 설계하면서도 삭발을 한다. 그러고 나면 기어코 해낸다. 그는 머리를 깎고 덤비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모양이다.
한 가지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삭발이다. 병역의무의 특혜를 받으며 군대생활을 대신하는 1,200여 명의 병역특례자 등 노동자들을 모아 두고 회사와 협상을 한다. 그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간부들이 수염은 깎지 않은 채 삭발을 한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삭발 의식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른 머리카락을 신에게 바침으로 신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일부 종교에서 종교적 삶을 시작하는 의식으로 머리 일부를 자르거나 밀어버렸다. 고대에 성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받다가 성직에 적합하다고 결정된 남자에게 엄격한 명령에 따라 치러진 의식이었다. 그 후 점차 짧게 깎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교황 바오로 6세가 1972년 제도를 폐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수도자들이 머리카락을 잘랐고 이때 추위와 태양열을 막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해 교황이나 추기경, 대주교가 모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머리털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구한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몸과 털, 살갗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함부로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는 것을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여겼다. 선비들은 차라리 목을 내줄지언정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버티기도 했다.
불교에서는 승려로 입문하는 의식으로, 머리를 깎는 날 자신을 낳아 준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세 번 큰 절을 올린다. 과거의 인연을 끊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마지막으로 감사의 절을 올리고 삭발을 하며, 그 후 자격을 갖춘 승려가 될 때 다시 삭발식을 한다. 승려가 된 후에도 수행에 임하기 위해서는 얼굴과 머리 모두 깨끗하게 면도한 상태를 유지한다. 불교에서의 삭발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한다.
-마음과 몸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까지 구제하기 위함이다.
-쓸데없는 욕심과 교만을 버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수행하는데 번거로움을 덜어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하기 위함이다.
-욕망에서 벗어나겠다, 사생결단(死生決斷)하겠다는 맹세이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수행을 방해하는 요인을 없앤다.(머리카락은 인간의 번뇌를 상징)
-머리카락이 교만을 상징하기 때문에 출가한 수행자들이 사회적 계급을 떠나 평등하다.
여성들이 머리를 자르거나 파마를 해 달라진 모습에 무관심하면 많이 섭섭해한다. 관심을 보일 때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안다. 그들은 오래 기른 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만도 큰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하물며 삭발을 한다면 보통 결심을 한 게 아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하면서 여성도 모두 머리를 밀게 했다. 여성에게 삭발은 형벌이며 치욕이다.
보수의 여전사로 불리는 한 무소속 의원이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삭발을 했다. 남성의 삭발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지만 여성의 삭발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남성들은 두발 자유화 이전 학창 시절을 보냈거나 군 입대 때 삭발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 기분을 충분히 안다. 삭발한 이 의원은 대통령의 법무장관 임명 강행에 항의와 분노의 뜻을 표했다.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선전포고다. 대통령의 아집과 오만함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타살됐다"라고 선언한 뒤 삭발식을 했다. 그는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도저히 봐줄 수 없다.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든다. 법무장관 임명 발상은 우리나라 국민의 법 감정에 맞지 않다. 보편적인 양심과 거리가 멀다.”라고 했다. 이를 두고 제1야당의 전 대표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삭발인가."라며 지지했다. 여당 성향의 한 의원은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쇼라고 깎아내렸다. 무소속 여성 의원에 이어 또 다른 여성의원도 삭발을 했다.
삭발은 강력한 항의의 수단으로 쓰인다. 독재정권 시절 대학생들이 삭발을 하기도 하고, 노동조합이 회사와 단체협상이 결렬되면 간부들이 삭발을 한다. 조직폭력배들은 두목에 대한 충성 맹세로 머리를 깎기도 한다. 정치권 인사들이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삭발을 한다. 삭발이 투쟁의 한 가지 방법으로 대중에게 강렬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투쟁을 경고하는 의미일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각오를 다짐하고 의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치권 삭발은 1987년 당시 박찬종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대선정국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머리를 깎았다. 2013년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이 위헌정당이라며 해산 심판을 청구하자 소속 당 의원들이 반발하며 집단으로 삭발을 했다. 야당 남성의원 5명도 삭발을 했다. 한 의원은 "삭발식의 의미는 사상 초유의 내 몸을 버리더라도 의를 좇겠다고 하는 심정이다"라고 했다.
내가 일하던 직장에서처럼 연구개발을 위해 각오를 다지는 삭발이거나, 종교인이 수행을 위해 삭발하는 거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삭발인가! 싸워서 뜻한 바를 이루려고 하는 삭발은 이제는 사라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