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독서모임

고마운 선생님

by 라블리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중학교 때가 가장 좋았다. 서점 딸인 나는 아빠의 전폭적인 문제집 지원과 스파르타 교육으로 전교 5등으로 중학교에 입성하면서 순조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나를 좋아했다. 왜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나의 실력이 물거품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봤기에, 선생님들이 왜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눈길을 더 주는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중학교시절 선생님들은 내가 공부도 꽤 하는 데다가 불량스러운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생이기에 나를 좋아했다. 머리는 귀밑 3센티, 흰 양말 두 번 접어신기, 교복은 수선 없이 단정하게... 모범생의 모범답안 다운 모습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안 좋아할 리가 있을까. 게다가 나는 서점집 딸이었다. '너희 집이 서점을 한다며?' 선생님들은 오가다 나를 마주치면 정답게 묻고는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다.



내가 가장 좋았던 시절은 중학교 3학년. 좋아하던 수학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되었다. 사실 원래는 영어선생님을 훨씬 좋아했었는데, 수학선생님이 담임이 되자 나는 선생님께 푹 빠지게 되었다. 어찌나 유쾌하고 똑똑하고 멋있는지.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 죽어라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다. 그땐 열심히 한 만큼 결과도 잘 나왔다. 나는 선생님께 원하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내게 제안을 하셨다. 반 전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면 어떻겠냐고. 선생님이 책을 선정하고 그 책은 우리 서점에서 전부 구매하겠다고.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너무나 감사해했다. 이런 멋진 제안을 하는 선생님이라니.... 책을 선정하고 며칠 후 서점으로 선생님이 오셨다. 오래전 기억이라 이 과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반 아이들 전체가 책을 샀었는지, 우리가 책을 읽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읽었던 책이다. 내게 선명히 남아있는 책 3권.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오타니 준코의 '다이고로야 고마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읽은 책이 별로 없었다. 서점 딸이 기껏 읽은 책이라고는 학습만화들이 대부분이었고, 사실 뭘 읽었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다. 중학교 3학년 선생님이 선정해 주고 읽었던 3개의 책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게 놀랍다. 아마 나는 그때 진짜 제대로 독서라는 걸 한 게 아닐까.


학문의 즐거움은 제목만 보고 따분함을 느꼈지만, 당시 수학에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던 내게 신선한 자극을 준 책이었다. 수학 선생님이기에 선정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분명 수학을 더 좋아했다. 수학뿐만 아니라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도 있었다.



과학콘서트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책이다. 과학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나? 완전히 몰입하여 책을 읽은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때 정재승 교수님의 팬이 되어 나는 그 팬심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열리는 강연에 신청해 직접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도서 이벤트에 당첨되어 직접 자택에 초대받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 당첨된 도서가 어린이용 도서라서 엄마가 아니라 아이만 집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만약 그 시절 선생님이 과학콘서트를 선정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KakaoTalk_20251220_073502014.jpg
KakaoTalk_20251220_073502014_01.jpg



'다이고로야 고마워'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장애 원숭이 다이고로를 키운 가족의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 맑은 눈망울의 다이고로의 모습이 오래 여운이 남았다. 편견 없이 오직 사랑으로 한 생명을 돌보는 이야기를 통해 선생님은 우리에게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다.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배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신 선생님.



나의 첫 독서모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다정한 선생님, 나를 참 예뻐해 주시던 선생님 덕분에 서점 딸은 그제야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준 선생님, 내가 서점 딸이 아니었다면 선생님도 아마 이런 제안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서점 딸로 사는 일이 더없이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keyword
이전 04화난 책 살 돈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