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보 Oct 19. 2021

49살에 미쿡교사가 될 수 있을까?

49살에 미국 새내기 교사되기


나는 미국 보스턴 지역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주민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교사다. 나이 49살에 처음 미국에서 공립학교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올해 7년째 미국 공립학교 교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7년 차 초임 교사다. 매일 첫 교단에 서는 마음으로 출근한다. 매일 아침 설레는 가슴으로 아이들을 만난다. 나의 교실이, 나의 가르침이 이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통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나이 49살에 미국 학교 교사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나이 49살이라면 보통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나이다.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로 여길 수 있다. 나는 남들이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에 나의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한 셈이다. 그것도 타국인 미국에서 말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인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49살 한국 아줌마가 미국 공립학교에서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을까?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고 인생은 예기치 않게 전개된다. 나도 내가 미국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7년 전인 2014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도 계획도 하지 못했다. 인생은 예측불허다. 내 계획과 상관없이 전개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가운데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한다.


미국 공립학교 교사가 되기 전까지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생의 쓴 맛과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은 10년이 넘은 일이어서 담담하게 회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아린 가슴을 잡고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나는 소위 경력단절녀였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15년 정도 하고 미국에 왔다. 미국에서 전문직을 갖고 싶었다. 하버드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시간 강사직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정규직 강사직은 불안정하다. 대학 시간강사직은 처우나 지위면에서 열악했다. 적은 임금에 상사의 갑질에 시달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사직을 그만두었다.


안정적인 전문직을 구하기 위해서, 박사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강의하고 싶었다.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밤잠 줄여가며 고3 수험생 이상의 강도로 공부에만 전념했다.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인지 건강에 무리가 왔다. 추간판 협착증이 심해져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학업은커녕 일상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학기도 마치지 못 한 채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치료에 집중했다.


안정과 휴식을 취하자,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읽고 쓰고 해야 하는 박사생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추간판 협착증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최우선 순위는 단연코 건강이다. 추간판 협착증으로 고생을 하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공부를 해서 무엇하랴. 학업이 아니라 직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하며, 일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평소 나를 언니처럼 따르던 같은 한인 교회에 다니는 후배가,


"언니, 학교 교사하면 잘하실 것 같아요. 교직으로 한번 알아보세요."


학교 교사를 권했다.  같이 있던 지인들도 한국에서 교사도 했고 하버드에서 영어교육 관련 전공도 했으니, 학교 교사를 해 보라고 권유했다.나는 속으로 "누가 나같이 나이도 많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줌마를 교사로 뽑아줘" 생각하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미국에 마흔 살이 다 되어 이주한 나는 이곳에서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다니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학교생활은 대학원 4년이다. 초중고교에서는 문화적인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학생들과의 의사소통과 정서교류가 중요하다. 초중고교 교사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부족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을 어떤 학교가 채용해 줄까? 초중고교 교사직은 내게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다시, 대학 시간강사직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조차 몰랐다. 그저 막막했다.


그러다 세월호 집회로 알게 된 한인 엄마가 던진 말 한마디가 단초가 되어, 교직에 대한 취업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나도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세월호 집회에서 일어난 우연이 나에게 교직의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2014년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큰 상흔을 남긴 사건이 일어 난 해다. 그해 4월 나는 보스턴에서 티브이를 통해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는 광경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그날 그 자리에 국가는 없었다. 보스턴 한인들은 비탄에 잠겼다.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정부에 분노했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150여 명의 한인이 하버드 스퀘어에 모였다. 첫 세월호 집회를 시작으로 몇 명의 한인 엄마들이 지속적으로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와 피케팅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해 6월 말 유가족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바자회를 열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바자회에서 대학강사로 일하고 있는 한 엄마로부터 대학강사직이나 교직 관련 채용공고를 알 수 있는 웹사이트 정보를 얻었다. 처음에는 대학강사직을 알아보려고 이 웹사이트를 검색했다. SchoolSpring.com이라는 웹사이트인데, 대학강사직뿐만 아니라 초중고 대학의 모든 교직에 대한 채용정보가 있었다. 이 웹사이트를 통해 교직 관련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내가 과연 교사로 일할 수 었을까? 작은 정보가 나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 소중한 정보 덕분에 나는 교사가 되는 길과 방법을 알게 되었고, 교직에 도전할 수 있었다.


첫 도전 첫 기회


처음에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교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원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 웹사이트를 매일 몇 시간씩 파면서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웹사이트를 통해  교사로 취업을 하려면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한지, 어떻게 채용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매사추세츠주 정부 ESL 교사자격증이 필수적이다. 교사자격증은 영어교육 관련 학위와 교사자격고사인 MTEL 시험 (Massachusetts Tests for Educator Licensure)을 통과하면 주어진다. MTEL 시험은 읽기와 쓰기, 전공시험 등 2종류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정보의 조각조각이 모이자,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어야 지원을 할 수 있으니, 교사자격증 시험 통과가 일차 목표였다. 2014년 7월 20일에 교사 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언제 시험을 볼 수 있을지 감도 못 잡았지만,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작이 반이다. 목표는 분명하고 갈 길을 아니, 이제 앞만 보고 가면 된다. 의기가 충천했다.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다.


기회는 나를 찾아왔다. 강물이 흐르듯 순조롭게 상황이 전개되었다. 교사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날,  보조교사 채용공고 포스팅을 보았다. 초중고교가 같이 있는 공립 차터스쿨 (자립형 공립학교)에서 초등학교 보조교사를 구하고 있었다. 보조교사여서 교사자격증은 요구하지 않았다. 보조교사라면 정교사를 그야말로 돕는 역할이니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지원서를 냈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성적표, 추천서 등을  SchoolSpring에 온라인으로 올려 지원했다. 이제 풀타임으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나의 꿈은 그렇게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기회는 계속 오고 있었다.  7월 24일, 지원한 지 4일 만에 학교 교장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운동을 하느라 받지 못해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귀하가 본교의 보조 교사직에 지원한 것을 압니다. 우리 학교에 4학년 영어와 역사 교사 자리가 새로 났는데,  관심 있으신지요? 전화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전화 목소리와 어조에 나에 대한 호감이 느껴졌다. 마치, 당첨 확률이 높은 복권을 한 장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지금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앞에 섰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기회를 어떻게 잡고 이용할 것인가! 결단과 전진의 시간이 온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