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쿡교사 심층면접,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다
교사지원서와 이력서에 담지 못 한 나의 이야기를 하라는 교장의 질문. 3초를 고민한 나의 선택은 내 청년시절의 체험과 이를 통해 형성된 가치관과 신념이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20대의 삶의 경험을 전했다.
‘나는 군사독재가 권력을 잡고 시민을 억압하던 1980년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나와 많은 이들이 시민의 자유과 권리,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정권에 저항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과 시민의 힘을 배웠습니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최선을 다 한 삶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20대의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교사로서의 신념과 철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장과 함께 한 면접관 교사들의 눈이 빛났다. 그들의 얼굴은 진지함과 강한 호기심을 동시에 드러냈다. 한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교사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 교장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다시 한번 일었다.
교장선생님이 나의 삶의 모토에 대해 물었다.
“저는 크리스천이며 내 신앙의 실천과 맞물려 다음의 말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Justice is what love looks like in public. 정의는 사랑이 대중 속에서 발현되는 모습이다."
나는 이 말을 뜻을 새기며 살려고 한다고 했다.
교장선생님이 자신도 이 말을 좋아한다고 누가 한 말인지 안다고 했다. 코넬 웨스트 Cornel West의 말이라고, 그를 존경한다고 했다. (코넬 웨스트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진보적 철학자, 정치사상가다. 현재,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순간 이심전심의 뭔가 뜨거운 공감의 분위기가 확 무르익었다. 면접이 이루어진 공간은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느끼는 무언의 공감대로 채워졌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는 공동선을 함께 지향한다는 가치의 공유과 유대감이 형성되는 듯했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그 순간 같은 마음이었고 그 마음의 끈이 서로를 묶어주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이 내 생애 취업 면접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면접에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을 나누는 기쁨을 체험했다.
중간에 농담도 같이 하고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가운데 대화가 계속되었다. 일방적으로 내가 질문에 대답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교육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자리였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나에게 질문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교사에 대한 학교의 기대나 요구사항에 대해서 물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들에게 많은 자율권이 주어져 특별한 요구사항은 없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교장선생님이 나를 학교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미국에서의 첫 교사 면접을 마쳤다. 1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면접을 마치고 여러 의미에서 흐뭇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내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회였다. 별로 긴장 안 하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밝힌 자신이 대견했다.
영어는 내게 모국어가 아니기에, 내가 영어를 어느 정도까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늘 궁금했다. 오늘 면접에서, 예상치 못 한 질문이 여러 개 나왔지만 기지를 발휘해 잘 대응했다. 용기 있게 침착하게 대응한 스스로의 모습에 놀랐다. 오늘 배운 중요한 점은, 핵심은 콘텐츠라는 점이다. 나의 철학, 나의 가치관이 부재했다면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내가 부족한 점은 내가 영어 네이티브가 아니라는 점이 아니라 나를 표현할 콘텐츠의 부족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기회의 나라, 미국!
10년 가깝게 살아오던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재발견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영어를 가르치는 기회를 주려는 이 사회가 참 감사하게 여겨졌다. 49살 난, 네이티브가 아닌 외국인 아줌마인 나에게 공립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서 이 사회에서 나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았다. 나의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배경을 보지 않고, ‘나’라는 사람 자체와 능력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가 제2언어라는 점도, 나이가 49살이라는 점도 교직을 구하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여기서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공정하게 기회가 주워지는 이 사회의 면모를 체험했다. 이것은 희망이다!
(물론, 미국이 인종, 문화, 언어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못 가는 현실이다. 조지 플로이드가 거리에서 살해되는 나라다.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도 내가 경험한 이런 긍정성은 이 사회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교장선생님의 열린 사고와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권위를 내세우지는 않는 태도가 나를 편안하게 대화로 이끌었다. 진정 소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교육자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어 나오는 교장선생님의 교육자로서의 통찰과 식견, 깊은 철학에 감동받았다. ‘저런 교장과 일하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크게 기대는 걸지 않기로 했다. 안 된다면 아직은 부족하니 더 준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웠다.
또 한 가지, 나이먹음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이먹음이 직업을 갖은데 꼭 부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나이 49살, 나이가 나이인지라 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철학과 교육에 대한 식견은 분명 장점이 될 수 있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서로가 다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오늘 첫 교사 인터뷰에서 느낀 것은, 교사를 뽑을 때 지식보다는 그 사람 자체, 그 사람이 가진 열정과 철학에 더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안 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일렀다. 매일매일 배워 일신 우일신 하니 떨어져도 크게 아깝지 않으리라!
실패를 통해 배우고 전진한다!
두 번째 심층면접의 기회가 왔다.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해 거의 마지막 관문에 이른 것이다. 첫 번째 심층면접에서 13명이 후보자 가운데 5명을 선발해서 두 번째 심층면접을 한다고 했다. 여러 경쟁자 가운데 5명에 뽑힌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뻤다.
2차 심층면접도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45 분했는데, 나만 1시간을 했다고 교장선생님이 인터뷰 후에 알려주었다.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였다고 했다.
2차 인터뷰에 임하면서도, 한편 돼도 걱정이었다. 미국에서 학교 교사로 가르친 경험이 전혀 없는데.. 내가 과연 초자로 정교사로 잘 가르칠 있을까? 전공도 아닌 미국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수업 준비하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을까? 담임을 맡아 아이들 생활지도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뽑는 것은 교장선생님 마음이니 이분께 그냥 맡기기로 했다. ‘전문가인데 사람 보는 능력이 출중하겠지. 인터뷰하면서 알아서 내 능력에 맞는 자리를 주겠지. 오늘의 인터뷰만 생각하자!’
두 번째 인터뷰에는 교장선생님을 포함 모두 5명의 면접관이 함께 했다. 이번에는 학급운영과 영어수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에 대한 대안, 수업 중에 말 안 듣는 학생에 대한 대처, 읽기 및 쓰기 지도 방법, 교실환경을 어떻게 구성할 건지, 4학년 소리 내어 읽기 read aloud 용으로 추천할 만한 책들, 수준별 학습에 대한 나의 견해 및 수업 적용 방법 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번 인터뷰도 훈훈한 분위기에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한국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후보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따뜻한 눈빛에서 그들의 호감과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과 다른 교사들은 나에게서 신선함과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나의 대답에 응수하기도 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나의 대답에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최고의 대답을 하려고 했다. 두 번째 심층면접도 면접관과 나와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즐거운 대화였다. 내가 잘했는지 못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면접관들과 유쾌하게 소통했고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며칠 안에 통보해 준다고 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을 뽑았다고 했다. 불합격을 통보받은 것이다. 전화통화 마지막에 "However, we admired you.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에게 경탄했습니다"라고 했다. 왜 안 됐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네이티브가 아닌 교사가 네이티브인 학생들의 담임이 되어 영어와 역사를 가르친다는 게 학교 측에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완전 초짜 교사가 아닌가. 나의 추측이다.
결국,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었다. 사실, 돼도 걱정이었다. 전혀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다. 다른 학교에 ESL 교사로 지원했고 서류 심사가 진행 중이다.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될 때까지 도전하면 된다.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으나, 자연스러운 낙관론과 자신감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