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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외갓집

첫눈이 모여 추억이 되었다/엽편소설

by 그래

어릴 적 나는 차멀미가 심했다. 귀에 붙이는 멀미약이든 먹는 멀미약이든 소용이 없었다. 그랬기에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는 외할머니 집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에서 고속버스가 있는 곳까지 30분, 고속버스에서 마산시까지 몇 시간, 마산시에서 다시 읍으로 들어가서 한 시간, 그곳 마을버스를 타고 또 30분. 버스를 타고 내려 걸어서 또 한참 가서야 겨우 외갓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논두렁밖에 없는 동네에 집은 몇 채 되지 않았다.


항상 우리집이 매일 마지막이었다. 이미 외할머니 집에는 엄마의 형제, 자매들로 가득 차서 잘 곳이 있을까 의문일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는 존재감이 없는 손녀였다. 그런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다른 손녀, 손자와 다르게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내가 늘 신경 쓰였는지 항상 눈으로 보시고 다가와 주었다.


“할머니, 이 짚은 뭐야?”

“소여물이지.”

“여물이 뭐야?”

“소가 먹는 밥.”


도시에 살 때는 본 적 없는 시골의 풍경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한쪽 눈이 없는 외할아버지는 은근히 다가와 홍시 하나를 내밀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신다. 외할아버지께서 준 홍시는 유난히 주황빛에 크고 달았다.


북적거리는 방안을 살짝 훔쳐보고, 외할아버지를 따라 문을 나섰다. 멀미로 정신없이 올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노란 벼들 사이로 뭔가가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아주 작은 청개구리다. 동화책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작다. 노란 벼 사이에 숨어서 긴 더듬이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메뚜기도 보인다. 시골에서만 맡을 수 있는 흙냄새가 좋아 코를 킁킁거리고 있으면 ‘훅’하고 들어오는 소똥 냄새에 코를 막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외할아버지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외할아버지, 어디가?”

“저기, 냇가에 간다.”


외할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 냇가로 가면 지금에야 아는 야생화 고마리가 한가득 피어있다. 그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물잠자리를 보고 있으면 외할아버지가 다가와 다슬기를 보여주었다.


“잡아 볼래?”

“어딨어?”


외할아버지가 바지와 팔을 올려주어 물속에 발을 담근다. 차가운 물에 살짝 놀라 외할아버지 옆에 붙었다. 외할아버지가 웃더니 돌 위에 붙은 다슬기를 가리킨다. 손을 쑥 집어넣어 들어 외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통에 담았다.


“요리 작은 건 빼고, 큰 것만 잡아라.”

“응.”


어느새 다슬기 잡는 재미에 빠져 물이 차갑다는 것도 잊었다. 외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통에 다슬기가 가득해졌다.


“가자.”

“응.”


바지가 젖은 것도 몰랐다. 외할아버지가 외투를 벗어 내게 입혀주었다. 외할아버지 옷에서 소똥 냄새가 났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돌돌 만 팔에 작은 손을 잡은 외할아버지는 담벼락 사이에 핀 골드메리를 하나 꺾어 내 머리에 꽂아주었다.


“예쁘네.”

“예뻐?”

“그래, 예쁘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길에 메뚜기 한 마디가 폴짝 뛰어 이쪽 논에서 저쪽 논으로 옮겨갔다. 신기함에 저쪽 논에 메뚜기를 찾아보았다. 이미 제 갈 길 가버린 메뚜기가 보이기가 만무하다. 외할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메뚜기 잡아줄까?”

“어? 아니.”

보는 건 좋았지만, 잡고 싶지는 않았다. 물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그때 시골 밤에 소리가 들린다.


“벌레가 우는 소리다. 벼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는구나. 바람 소리다.”


내가 궁금해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외할아버지가 알려주었다. 사람 소리 하나 없는 시골 밤은 다양한 소리를 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어린 내게 악기처럼 들렸고, 음악처럼 들렸다.


“가자.”

“응.”


외할아버지의 소리에 뜬 눈에 하늘이 보였다.


“와.”

“넘어지겠다.”


커다란 외할아버지의 등에서 바라본 하늘은 예뻤다. 하얀 별과 파란 하늘이 보석같이 보였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걷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하지?”

“응. 신기해.”


외할아버지와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엄마는 말도 없이 나갔다며 화를 냈다.


“나한테 말하고 나갔는데, 내가 잊었다.”


외할머니의 변명에도 엄마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늦은 저녁, 한 방에 몰린 방에는 언니, 오빠들이 다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밖을 보았다. 외할아버지가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평상에 이불을 깔고 모기장을 펼치고 있었다. 베개를 가지고 나와 외할아버지 옆에 누웠다.


“추울낀데.”

“괜찮아.”


외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두꺼운 이불을 하나 가져와 덮어주었다.


“안 춥나?”

“응.”

“할아버지, 꽃 잃어버렸어.”

“괜찮다. 밖에 많다.”


외할아버지 옆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역시 하늘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예쁘제?”

“응. 예뻐.”

“이게 다 추억이다. 다 크면 내는 잊어도 할아비하고 본 것들은 기억하래이.”

“나는 할아버지도 기억할 건데.”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외할아버지가 웃었다. 외할아버지 품에서 잠든 그날 시골 밤이 외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그 후로 외할아버지는 서울 큰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려고 노력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쪽 눈이 없었던 외할아버지였기에 외할아버지와의 외출은 나만의 특권이었다. 다른 언니, 오빠, 동생들은 외할아버지가 무섭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정 사진 속에 외할아버지는 양쪽 눈이 다 있었다. 그래서 낯설다. 나의 추억 속에 외할아버지와 달라서 보면 볼수록 모르겠다.


“와?”

“할머니, 할아버지 아닌 것 같아.”

“글나?”

“응.”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옷소매로 닦으셨다.


“평생소원이었는데, 죽어서라도 풀어줘야지.”


장례식 내내 울지 않던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없이 홀로 그 시골집을 지켰다. 여전히 친척들과 어울리지 않는 나에게 외할아버지 대신에 홍시를 가져다주었다.


“와, 나가고 싶나? 할미는 다리가 아파서 멀리 못 가는 데, 우짜지?”

“나 혼자 갈 수 있어.”

“진짜?”

“나도 이제 학교 다니거든.”

“멀리 가지 마래이. 그러다 길 잃으면 집에 못 온다.”

“응.”


용감하게 나선 길은 낯설었다. 길을 따라다닌 게 아니라 외할아버지 신발 뒤꿈치를 보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세 갈래 길이 있는 곳까지 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기억 나지 않았다. 그저 외할아버지가 한 말만 생각났다.


“이리로 가면 저 짝 산에 가는 길이고, 이리로 가면 읍내 가는 길이니까 니 혼자 절대 가면 안 된다.”


대답은 늘 했지만, 이리가 이리 같고, 저리가 이리 같은 게 헷갈렸다. 이러다 집에 가는 길도 헷갈릴 것 같아 돌아섰다. 그런데 진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 눈엔 모두 똑같은 길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도 없는 시골길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외할아버지가 있을 때는 시골 밤에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공포였다. 그때 멀리서 외할머니 소리가 들렸다. 걷지도 뛰지도 않는 잰걸음으로 오신 외할머니는 길 한복판에서 울다시피 서 있는 나를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내가 안 그래도 요기서 네가 길을 잃을 것 같더라.”


외할머니와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소여물이 한가득 쌓여 있는 집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때 옆에 있는 감나무가 보였다. 소여물 꼭대기로 가면 손을 닿을 위치에 빨간 홍시가 먹고 싶어 천천히 올라갔다. 드디어 닿은 홍시를 먹으면서 외할아버지가 생각나 울어버렸다. 외할아버지 등에서 보던 하늘이 그리웠다.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외할아버지의 등에서 보던 하늘과 달랐다. 실망감에 고개를 숙이다 보았다. 좀 전에 내가 헤매던 세 갈래 길이 말이다. 고작 외할아버지 집 모퉁이를 한번 돌고, 두 번 도는 짧은 거리도 기억 못 하는 어린애였다. 외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이 기억났다.


“내는 잊어도 할아비와 본 것들은 기억하래이.”


이제야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

“응, 할아버지. 내가 어른이 되어도 꼭 기억할게.”


지금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때 부모님과 함께 갔던 외갓집은 주인이 없는 채 1년을 버티다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당연히 소여물도 감나무도 없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추억할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외할아버지와 나와 둘만 알던 장소는 찾을 길이 없고, 내게 남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가지고 지키고 있는 추억뿐이다. 이 추억만큼은 절대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그때의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작성일 : 2024년 10월 15일
출판사 : 포레스트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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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냇가에서 노는 할아버지와 손녀.png AI/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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