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문을 여는 글쓰기/여유
오늘의 주제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이상적인 여유란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글에 나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것들을 모아 엮어내는 편이다. 어떤 작가에게 말한 것처럼 소설은 90%의 진실과 10%의 허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 녹여내는 것들이 바로 나의 삶에서 얻은 여유다. 누군가에 조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증거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그리고 이뤄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지나온 삶을 묻는 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할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건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신에게도 있다.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 지나온 삶에서 늘 성공만 했냐면 분명 아닐 것이다. 실패와 좌절 속에 당신은 좀 더 나은 내일을 살았을 것이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는 과정에서 보람이나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가? 그걸 의미하는 다른 말은 바로 당신은 이미 살아 본 삶이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당신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현재를 즐길 여유는 없다. 그런데 당신이 조언을 해준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될 것이다.
나이는 괜히 먹는 게 아니다. 사는 동안 쌓은 경험과 듣고, 보고, 미움받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것들이 나이 속에 누적된다. 이걸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는 본인에게 달렸다. 나는 글로서 소통한다.
오늘도 나는 다양한 단톡방에서 다양한 소통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 살아온 삶은 참으로 도움이 많이 된다. 오랜 기간 책을 출간한 경험은 나름대로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책을 출간하고자 마음먹은 작가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하다. 이미 경험한 내가 해주는 얘기가 그들에게는 신세계이고, 새로운 정보가 된다. 이건 나의 여유가 주는 선물과도 같다. 알기 때문에 답변해 주고, 이미 해보았기에 진심 어린 조언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게 선의였으나 다 호의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코멘트로 남겨주는 여유가 생겼다.
“이 모든 것들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이걸 수용할지 말지는 작가님의 몫입니다. 글은, 원고는 작가님 것이니까 작가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걸 남기는 이유는 나를 위한 배려다. 비록 여유와 짬에서 나오는 조언이지만, 자기 글의 지적은 작가에게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배려라는 걸 아는 작가님들은 진짜 소수다. 그러나 상관없다. 내가 부릴 수 있은 유일한 사치적인 여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하는 여유가 바로 인생 조언이다. 특히 지금을 살고 있는 2, 30대를 좋아한다. 그들에게 삶은 불안의 연속일 것이다. 나도 살아봤기에 안다. 나는 한껏 여유를 뽐내서 그들에게 말한다.
20살을 기준으로 이전은 무엇을 해도 괜찮았다. 사회 제도, 학교, 부모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최대 장점이다. 이걸 이용하기도 하고, 어른보다 더 나쁜 행동을 하는 친구도 있지만, 이들이 이럴 수 있는 건 다 뒤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2, 30대도 마찬가지다. 그때의 나이도 시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방탄하고 훌쩍 떠나기도 해도 된다. 버럭 화도 내보고, 밤새도록 울어도 괜찮다. 뜨겁게 사랑을 하고, 시리고 아프게 이별해도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나이가 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건 10대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해도 된다. 하지만 두 나이의 차이에는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책임을 내가 지느냐 아니면 남이 지느냐 차이는 꽤 크다.
내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2, 30대에 하는 일이다. 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른다. 가끔 샛길로 가보기도 하고, 없는 길을 만들어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이걸 아는 것도 나이가 주는 여유 때문이다. 이미 경험했기 아는 것, 이미 보았기에 아는 것들이 지금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오늘은 치열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어린 당신에게는 내가 여유롭고 한가하게 글이나 쓰며 사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랬기에 당신을 이해한다. 내가 다시 20살이라는 나이를 먹어 할머니라고 불리게 된다면 그때도 나는 여유롭게 살 것 같냐고 묻는다는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오늘 사는 모든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하루에 집중하고, 닥친 사고를 해결하고, 해야 하는 것들을 하면서 산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나는 여유는 없다.
마지막으로 정말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
혹시 ‘∞’ 이 기호는 아는지? 이건 무한대를 말하는 수학 기호이다. 삶은 이 기호가 들어가야 풀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은 ‘0.000000……’으로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 수학은 항상 답은 있다. 공책을 가득 채운 ‘0’이 이어진 후에 언젠가는 ‘1’이라는 숫자를 보게 될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1’인 줄 알았던 마지막 숫자가 ‘9’일지도 말이다.
지난 삶에서 당신도 여유를 찾길 바란다. 그리고, 그 여유는 누군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여유로 진짜 뜻깊고, 길이 남을 조언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을 사는 당신들은 어떻게 행운을 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건투를 빈다!라고.
오늘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가장 이상적인 여유라?? 돈이 많아도 불행하다. 인맥은 도움도 되지만, 동시에 힘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간은 많다고 생각할수록 게으르게 만든다. 젊음은 욕심을 부르고, 재능은 자만을 부른다. 어느 것이든 과하게 되면 단점이 생기고 이건 절대 여유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 여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전제 조건이 붙었다. '이상적인' 나는 여기서 멈췄다. 이 말에 포커스를 맞추고, 고민했다. 여러 단톡방에서 활동하는 나는 내가 내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내 글에 대한 실시간 반응도 볼 수 있다. 그렇게 객관적인 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그제야 이상적인 여유가 뭔지 떠올랐다. 여유는 지금을 살고 있는 나는 없었다. 나는 하루가 결단코 만만치 않았고, 이상적으로 살려고 해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몸은 자꾸 딴짓을 했다. 하지만 이미 살아온 나는 아니다. 절대 바꿀 수 없는 과거에서 나는 내가 필요한 한 것들만 꺼내온다. 경험, 관찰, 보고 들은 모든 것들 중에 내 글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져와 쓴다. 이 얼마나 여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없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다. 평가도 평점도 없다. 오로지 기억하고 있는 과거 속을 헤집어 필요한 것만 쓰고, 쓰거나 나쁜 기억은 그대로 둘 뿐이다. 정말 이상적인 여유가 아닌가?
그리고 이상적인 여유는 누군가에게는 정말 필요한 조언이고, 피드백이 될 수 있다. 지금 당신이 디딘 그 돌은 흔들거립니다. 혹은 그걸 디딛면 당신은 가라앉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면 당신은 피해 갈 수 있다. 이미 디딘 나는 넘어지기도 하고 물에 빠져 봤다. 이 조언은 믿고 안 믿고는 당신에게 달렸으니 그것까지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이상적인 여유가 완성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글에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그냥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글을 나열했을 뿐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