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그림 2 일차_기초투시

2025년 06월 14일(날씨 18° / 28°, 살짝 소나기)

by 그래

노트북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들고, 8절지 드로잉북과 필통을 챙겼다. 어젯밤 가방을 챙기면서 새로 산 연필들이 지인이 선물해 준 작은 필통에 들어가지 않아 난감했다. 부랴부랴 저렴하지만, 예쁘고 긴 미술 필통을 조회해서 하나 주문했다. 사는 김에 연필 뚜껑이 보이길래 고양이 발바닥 모양을 한 캐릭터 뚜껑도 충동 구매했다. 다시 학교를 간 것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오늘 학원에서 돌아오면 와 있을 새 학용품을 기대하며 여전히 인파들로 넘쳐나는 지옥철을 탔다.


시골 작은 역이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편이다. 살고 있는 저역에 역이 딱 두개 있는 탓이었다.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가끔 바로 전에 출발하는 전철을 타면 앉아서 서울까지 갈 수 있었다. 중간에 홍대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몇 개 안 되는 역을 통과하면 금방 도착했기에 처음 출발할 때 앉아서 간다면 괜찮았다. 남편이 데려다주는 시간엔 운좋게 그 열차를 탈 수 있었다. 급한 성격 탓에 전철 시간표까지 체크하면서 타는 성격은 아니다. 그냥 오는 대로 아무거나 탔다.


학원까지 갈 때는 운에 따라 앉아서 갔지만, 올 때는 지옥철로 인해 계속 서 있어야 했다. 덕분에 낡은 운동화가 말썽이었다. 발은 붓고, 쿠션이 거의 사라진 밑창은 발바닥을 가열시키고, 아프게 했다. 남편은 거실로 들어가는 발을 보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발 아파?"

"응. 발 아파."

"운동화 살까?"

"모르겠어."

남편은 밤새도록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자랑스럽게 외쳤다.

"며칠 후에 신발하나 올 건데, 이거 발 안 아프데."

"정말?"

"어, 어차피 여름이니까 샌들도 괜찮지?"

"어. 발만 안 아프면 뭐든 괜찮아."


남편의 든든한 지원에 아픈 발이 좀 덜 아픈 것 같았다. 날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개인 카페를 운영하셨다. 덕분에 오늘 배울 수업을 미리 볼 수 있었다.


[투시]


그림에 관해 1도 몰랐기에 투시라기에 초능력을 배우나 했다. 수업내용을 들어보니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선생님은 본 대로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드로잉북을 4조각으로 나눠서 가운데 점을 중심으로 20개의 평면 사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도형으로 바꾼 다움 꼭짓점을 중심으로 도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라고 예시를 보여주셨다.


드로잉북을 펼치고, 30cm 자를 꺼내 선을 그었다. 각기 다른 네모를 그리고, 선생님은 네등분한 사각형에 그리다 문득 선에 가까우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했다. 짱구같은 성격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새로운 시도를 불렀다. 선을 쭉쭉 그어가면서 모양이 바뀌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수업이 끝날갈 씀 사각형을 다른 모양을 바꿔서 해보라는 말에 너무 놀랐다. 작고 크고, 길쭉한 사각형을 뭘로 바꿔야 할 지 고민하다 수업이 끝났다. 집에 돌아가는 전철역에서 무엇으로 바꿀지 고민은 이어졌다.


드디어, 집에 와서 손을 씻고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첫번째 사각형은 다른 작가님들이 올려주는 글자를 몇 개 넣고, 크게 한 덩이의 사각형은 집을 그려봤다. 다른 쪽은 긴의자를 그리고, 한글도 도전해보고, 계단 나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린 다음음 선을 긋고, 지우고...


분명 어렵고, 귀찮고, 힘들었다. 그래도 내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처음 물감을 만졌던 그때, 학교를 들어간 꼬마 내가 지금 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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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 도형과 내 방 그리기

한참 숙제까지 마치고, 뿌뜻하게 그림을보고 있는데, 딸이 와서는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했다.


"어? 책은?"


나도 책을 그리고 싶었다. 앨범도 그리고, 시계도 그려놓고, 작은 소품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뭔가를 첨가할마다 그림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욕심은 버렸다.


"엄마, 엄마 방에 컴퓨터 데스크북이 아니었나?"

"여보, 의자가?!!"

작업용 컴퓨터는 노트북이다. 그건 거실 나의 공간에 있다. 방에 있는 것은 커다란 데스크북이 맞다. 몇번의 도전 끝에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나마 그리기 쉬운 노트북으로 바꿨다. 의자는 크고, 푹신하고, 길쭉하지만, 그또한 내 영역 밖이었다. 식구들이 하나들 들어올 때마 익숙한 방 모습에 입을 하나씩 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격한 공감이 그리고 지적이 부담스럽기는 커녕 그래도 비슷하게 그렸으니 이리 말하는 거라고 웃었다. 잘 그렸다는 칭찬은 들었지만, 동시에 틀린 점 찾기는 멈추지 않았다. 난 내 그림에 관해 내 글처럼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래, 책은 없다. 맞아, 우리 방에 컴퓨터는 데스크북이지. 의자? 전혀 달라. 맞아."


누가 봐도 나는 그림 실력이 1도 없다. 자를 대고 그려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릴 정도로 성격도 급하고, 차분함은 오로지 글 쓸 때밖에 생기지 않는 글 덕후다. 그런데 그림 그릴 때 집중력은 글 못지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남편과 챙겨 먹는 아점저 후 무려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도형을 완성하고, 추가로 해보라는 내 방까지 그렸다. 긴 시간을 들여서 '우와'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름 만족한다.


방과 똑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도면과도 같은 방이 나왔지만, 이번만큼도 충분히 잘 그렸다고 생각하기에 마무리하고 사진을 찍었다. 과제를 올리며 나의 이름 석자를 남겼다.


수십 번의 지우개 자국으로 얼룩이 가득한 드로잉북은 수십 번의 퇴고를 마친 글만큼 좋아졌다. 몇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보는 걸 그리는 것이 아닌 보일 법한 면적을 그리는 것이라 더 어려웠다. 게다가 쉬운 도형도 못하는 내가 굳이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해본 건 욕심이기도 했다. 욕심이면 어떻고 무모한 도전이면 어떤가 내가 무엇보다 재밌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비슷하게 나올 때마다 묘한 쾌감은 덤이었다.


그림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그림을 한 장씩 완성해 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하, 내일이 쉬는 날이라는 것이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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