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솟아오른 불을 본 이후 한동안은 기억의 조각이 희미하다.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랑 산 적은 있어도 아빠랑 셋이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자주 집을 비웠다. 아마도 돈을 벌러 가신 게 아닐까 싶었다. 아주 작고 초라한 단칸방의 집 내부는 이상하게도 온통 시멘트였다. 낯선 집안에서 유일하게 익숙했던 이불을 보호막삼아 나와 내 동생은 늘 꼭 붙어 잠을 잤다. 자고 있으면 동생 얼굴에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곤 했다. 그 집에서는 학교조차 가지 못했었는데 도대체 뭘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집에 머물던 시절의 나와 내 동생을 조용히 떠올려보면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 생각이 난다. 아빠와 새엄마에게서 버려진 숲 속의 어린 남매. 숲 속의 밤이 드리우면 어린 남매는 목숨을 위협받는 그 상황이 무서웠을까? 기어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사실이 무서웠을까? 과연 무엇이 남매를 더 숨 막히게 했을지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매는 살려고 애쓴다. 아마도 살려야 할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와 내 동생도 그러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한 달여 정도 짧게 머물렀던 그 집의 기억이 나는 꿈같았다. 제발 꿈이고 싶었다. 언젠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던 잔상이겠지라고 치부했다. 동생과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 집이 실제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으로 마음이 서글펐다.
엄마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따금 엄마를 상상했다. 상상 속 엄마는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계셨다. 고된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엄마는 어두운 작은 방 한켠에서 혼자 술을 드시고 계셨다.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분명 두고 온 딸들을 그리워하고 있음이라 생각했다.
잘 살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어디서든 엄마의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그 집에서 탈출해 지하 1층의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는 오히려 기뻤다. 볕 하나 들지 않은 지하에다가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가 나긴 했지만 꽤 넓었었고 위층에 작은 마당도 있었다.
1층에는 나보다 2살 많은 눈이 좀 불편했던 오빠랑 그 오빠의 여동생도 있었다. 또래가 있었기에 나와 동생은 자주 1층에 올라가서 놀았다. 그 아이들의 아빠는 외국에 나가 일을 하셨다. 그 집 아주머니는 엄마 없이 살고 있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나와 내 동생을 살뜰히 챙겨주셨다. 나와 내 동생을 대동해 혼자 아이 4명을 챙겨 근처로 소풍을 나가기도 하셨다. 나와 내 동생은 거의 매일 그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다행히 아빠는 우리를 때리지 않았다. 우리도 아빠를 꽤 반겼다. 며칠, 혹은 몇 주에 한 번씩 들어오는 아빠이지만 아빠를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와 내 동생은 아빠의 팔을 하나씩 차지해 잠에 들곤 했다. 코끝으로 아빠의 겨드랑이 냄새가 맴돌았지만 상관없었다. 아빠가 있었으니까. 불완전한 아빠였지만 그래도 아빠가 집에 오면 안심이 되었다.
시간이 될 때면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북한산도 오르고 강원도로 일출도 보러 갔다. 아빠도 아빠 나름대로 그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나와 내 동생을 예뻐했다. 특히 동생을 예뻐했다. 아빠는 가끔 나를 보며 애가 애같이 않다고 말을 했다. 또 엄마를 닮았다고도 했다. 아빠가 나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좋아하지 않다는 것을 아빠의 눈을 통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두려웠다. 나에게 아빠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분명 엄마를 닮은 내가 아빠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엄마처럼 때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친가 식구들이 모일 때면 엄마의 이야기는 늘 도마 위에 올랐다. 어떻게 자식을 놓고 나가냐는 험담을 하기도 했고, 엄마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반응도 있었고, 지금 엄마는 어디에 있을지 행방을 추리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기억하는지도 모른 채 내 앞에서 집안의 다양한 사건들을 쏟아내었다.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끔은 내가 귀머거리였으면 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동생이 배가 너무 아파 119를 불러 응급실에 실려갔었다. 어린 내가 동행할 수 없어 윗집 아주머니가 보호자가 되어 따라가셨다. 응급차에 누워 멀어져 가는 동생을 보며 나는 동생마저 사라질까 두려웠다. 응급차가 사라진 텅 빈 거리에 홀로 있는 내 모습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될 것 같아 무서웠다. 동생이 아프면, 동생이 없으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겁이 났다.
다행히도 원인은 가벼웠다. 가스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해 배가 아팠던 거였다. 따돌림을 당했던 동생이 학교에 있는 동안 모든 생리현상을 다 참았던 모양이었다. 처음 겪는 응급실 사건이었지만 그 속에 있어야 할 아빠는 없었다.
물난리가 난적도 있었다. 폭우가 왔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자고 있는데 얼굴이 차가웠다. 눈을 떠보니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었다. 천장에서 새는 것뿐만 아니라 책들이 있던 방바닥 쪽에서도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집안은 이미 정강이 중간 정도 높이까지 물이 차서 철렁거렸다. 나는 가장 먼저 엄마와 우리들 사진이 담겨있는 앨범을 찾았다. 앨범을 안전한 곳에 두고 나와 내 동생은 작업을 시작했다. 흙탕물로 가득한 물살을 헤치며 작은 바가지와 세숫대야로 끝없이 물을 퍼냈다. 약소하지만 꼭 필요했던 세간들과 소중했던 나의 책들까지 빗물은 그렇게 나와 내 동생의 터전을 휩쓸고 갔다.
비가 많이 오면 낮은 저지대는 정말로 침수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 당시에는 침수가 발생하면 침수 피해자에게 국민들이 모금한 돈을 주었었다. 하루아침에 수재민 딱지가 붙은 나와 내 동생은 나라에서 수재의연금을 받았다. 그날도 아빠는 우리 곁에 없었다.
머지않아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삼촌은 나를 찾아와 아빠를 빼내야 하니 글을 쓰라고 하셨다. 11살의 나는 탄원서라고 불리는 그 글을 필사적으로 써 내려갔다.
가끔 오더라도 올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과 아예 올 수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더 깊은 바닥이 열리고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엄마 없이 아빠랑 살고 있으니 혹여 우리 아빠가 잘못한 부분이 많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달라는 내용을 썼다. 더불어 우리를 보호할 어른이 없으니 아빠를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도 적었다.
하지만 경찰을 때린 아빠는 결국 나오지 못했고 교도소에 오랜 시간 머물게 되었다.
나와 내 동생은 마침내 고아가 되었다. 나와 내 동생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이때 아빠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길래 경찰을 때릴 수 있을까? 과거에 어떻게 살았길래 저런 사람이 되었을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새파랗게 어린 자식 두명만 두고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갈 수 있을까?
엄마는 어디 있을까? 엄마가 정말 우리를 데리러 올까?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면 우린 고아원에 가게 되는 걸까? 엄마는 우리가 보고 싶을까? 엄마를 따라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게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이 수많은 물음에 답을 하기에 나는 아직 어렸었다. 그리고 11살짜리가 품어야 할 고민의 종류도 아니었다.
불행한 일들을 연달아 마주하다 보면 울 여력이 없어진다. 울어야 할 에너지를 아껴 살아야 할 에너지로 바꾼다. 그냥 그런가 보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보다 생각한다. 벌어진 상황은 크게 중요치 않다. 그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중요함으로 흐름에 쓸리지 않은 채 부표처럼 그 자리에 둥둥 떠서 산다.
졸지에 고아가 된 나와 내 동생은 고모집으로 가게 되었다. 돌정도 된 어린 아기와 치매 걸린 시어머니, 일용직 노동자인 고모부가 살고 있는 고모네 집으로 나와 내 동생은 옮겨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