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저희 자매는 병을 팔아 생활합니다.

by 은은한 온도

나와 내 동생은 또 한 번 삶의 터전을 옮겼다. 매일 얹어먹었던 밥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외부인인 윗집 아주머니보다는 고모의 밥이 훨씬 안락했다.


고모네 집은 서울시 화곡동 4층의 작은 빌라였다. 가파른 계단을 쉼 없이 걸어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르면 바로 오른쪽 문이 고모네 집이었다.


주방 싱크대 맞은편 방은 치매에 걸려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 고모의 시어머니이자 우리에겐 그저 할머니라 불리는 분의 공간이었다. 그 옆에는 이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안방이 있었다. 안방에는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세 살 정도 된 아기가 함께 자는 곳이었다. (사촌동생이 한 살이었는지 세 살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와 내 동생은 안방과 현관 사이 미닫이 문으로 된, 거실을 가장한 여유공간에서 잠을 잤다.


지금 곱씹어 생각해도 고모가 나와 내 동생을 거둔 것은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선택이 분명했다. 그만큼 고모는 나와 내 동생을 예뻐했다. 그리고 다행히 '아빠 잘못이지. 어린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라는 말을 하심으로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혈육이라는 길로 연결된 안전함이 나와 내 동생에게 찾아왔다. 울타리를 제공받은 느낌이었다. 울타리 덕분에 최소한 밥을 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눈치가 보였다. 고모가 눈치를 주진 않았음에도 눈치를 봤다. 그리고 나는 눈치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고모가 술에 취해 목놓아 울 때면 더욱 그랬다. 고모가 아빠 얘기로 화를 내거나 엄마 얘기를 읊조릴 때 혹시라도 홧김에 우리를 내쫓지는 않을까 나는 늘 겁이 났다. 래서 눈치껏 움직였다. 또 다른 의미의 생존이 나와 내 동생 앞에 펼쳐진 셈이었다.


할머니는 화장실 벽에 꽤 자주 그녀의 인분칠을 해놓았다. 분칠을 해놓았을 때마다 할머니는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고모는 그런 할머니를 대차게 나무랐다. 고모는 할머니를 씻길 때도 성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와 내 동생 역시 고모의 잔업들을 도왔다. 인분이 묻은 화장실을 함께 치고, 뼈가 앙상한 할머니의 몸을 씻기고,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고, 아기와 놀아주고, 설거지도 하고,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돕고, 쓰레기도 버리고, 이불도 개키고, 빨래도 함께 널었다 접었다. 나와 내 동생은 밥값을 하기 위해 너무나 당연히 몸을 움직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와 내 동생은 돈이 없었다. 고모가 나와 내 동생에게 용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다른 것은 괜찮았는데 년이 올라갈수록 써야 하고 필요한 학용품이 늘어가는 것이 문제였다. 학교에 가지고 가야 할 준비물들도 점점 많아졌다.


고모는 어느 날 나를 은행으로 데려갔다. 이제는 내가 12살 고학년이니 네 돈은 네가 관리하라고 했다. 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도장과 통장이 생겼다. 고모는 돈을 그 통장에 넣고 꾸준히 모으라고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열심히 돈을 모았다.


가끔 고모나 고모부의 지인들이 집으로 놀러 올 땐 기쁜 날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시끄럽긴 했지만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때는 슈퍼에 미성년자 술, 담배 심부름이 가능했기에 자처해서 나갔다. 술도 사 오고 안주도 사 오고 고모 따라서 술상도 열심히 차리면 손님들이 집에 갈 때 기특하다며 나와 내 동생에게 용돈을 주었다. 그때 받은 소중한 거금을 통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또 고모는 나와 내 동생에게 고모의 하얀 머리를 뽑게 했다. 새치 1가닥에 10원. 무려 100개를 뽑아 1000원을 받은 날도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고모의 머리가 쑥쑥 자라 다시 흰머리를 뽑을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모가 책받침이나 검정 색깔 책을 손에 쥐고 안방으로 들어가면 그날은 뽑기 날이었다. 고모의 짧은 머리를 뒤적이다 보면 손에 두피 냄새가 베여 큼큼했다.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가 금세 1시간이 훌쩍 흐르곤 했다. 나는 고모와 함께하는 이 흰머리 뽑기 시간이 참 좋았다.


친가의 식구들은 아빠를 포함하여 모두 술을 좋아하고 잘 드셨다. 고모집에도 늘 술병이 있었다. 고모는 그 병을 슈퍼에 팔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병만 가져다가 팔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내 동생은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고모네 동네에는 건물 1층마다 쓰레기가 내어져 있었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뒤적려 빈 병들을 찾아냈다. 빈 병을 발견할 때면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병은 실제로 나에게 희망 같은 보물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나면 나는 큰 봉지를 들고 다니며 동네를 순회했다. 찌든 냄새가 피어나는 맥주병 , 알코올 냄새 가득한 소주병들이 내가 들고 다니는 봉지 안에서 창그랑거렸다. 그렇게 봉지 가득 병들을 모아 풍당당하게 슈퍼로 가면 무척 뿌듯했다. 슈퍼 아저씨도 칭찬해주었다. 나는 내가 모은 병을 돈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그 돈은 곧 나와 내 동생의 학용품이 되었고, 간식이 되었고, 준비물이 되었다.




고모네 집으로 옮겨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전학이든, 학년이 바뀌든 첫 등교날에 여러 장의 종이를 적어내야만 했다. 유난히 그 해에는 종이 쓰기가 참 싫었었다.


종이에는 늘 변함없이 아빠 이름, 아빠 직업, 엄마 이름, 엄마 직업 따위를 적는 칸이 있었다. 물론 비상연락망 때문에 적는 것이었겠지만, 땐 그 종이에 적힌 단어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내 화가 났다.


아니,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부모가 있어?

아빠가 없을 수도 있고, 엄마가 없을 수도 있잖아.

이걸 왜 모든 칸에 이름까지 다 적어야 해?


나는 엄마, 아빠 칸에 그들의 이름을 적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나의 형편이 서러웠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나의 신세가 억울했다. 더욱이 친구들이 모두 함께 있는 곳에서 이 종이를 써야 한다는 자체가 혹하게 느껴졌다.


바야흐로 24년 전, 1998년은 그러했다. 1998년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다름'이 인정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일반적인 흐름과 다른 흐름 속에 사는 이들은 금방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었었다.


빈칸으로 적어냈을 때 혹여라도 다른 친구들이 비어있는 여백에 의문을 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 종이를 적으면서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묵직한 감정의 타깃을 찾았다.


교실에서 쓰게 하는 담임선생님을 탓해야 할까? 애초에 이걸 적어서 내게 하는 학교를 문제 삼아야 할까?

아니면 딸이 가라고 했다고 진짜 가버리는 엄마를 미워해야 할까?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아빠를 원망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망할 놈에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신 힐책해야 할까?


누구를 탓해야 할지는 몰랐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짓말을 하며 숨기고 싶지 않았다. 구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을 있는 척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 아빠 없는 것을 없다고 하지 또 뭐라고 하겠는가. 그게 사실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내 입으로 직접 말하곤 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친구들의 곁눈질을 통해 수군거림을 귀로 전해 듣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때 즈음부터 그런 종이를 쓸 때마다 자세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왼팔 전체로 종이의 테두리를 에둘러 방어막을 치고 고개를 꼿꼿이 세운채 썼다. 친구들에게 굳이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 그럼에도 당당한 내 마음이 한데 섞여 딘가 어색한 포즈를 자아냈다. 나는 칸을 채울 수 있을 때는 채워서 비워둘 때는 비워서 종이를 제출했다.




세끼 식사와 께 스스로 눈칫밥을 먹으며, 병을 팔아 살던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이었다. 드디어 고모집으로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