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전화는 내가 학교에 있을 때 걸려왔다.
이제 곧 엄마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고모가 말해주었다. 마음이 속절없이 일렁거렸다. 한 번 파도가 친 마음은 좀체 다스려지지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엄마를 보러 가고 싶었다. 엄마와 살지 않는 동안 어느덧 두 살이나 더 먹었는데 혹시라도 엄마가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엄마는 어떻게 지냈을까?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이 보고 싶었을까?
엄마는 이제 준비가 다 된 것일까?
엄마와 비로소 함께 살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마음을 덜어내고 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순간부터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한 움큼씩 마음을 비워내 갔다. 나는 엄마가 나와 내 동생을 찾으러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를 늘 염두에 두었다. 최악의 순간과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감정 속에 나를 담그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만 집중했다. 시간이 나를 관통해 빠르게 흐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었다.
엄마를 보러 간다는 소식은 그동안 덜어낸 줄 알았던 나의 마음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흔들어진 탄산가스가 입구를 찾는 것처럼 꾹꾹 눌려진 내 마음이 엄마라는 방향을 항해 솟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그동안 줄곧 엄마가 보고 싶었다는 것을. 가슴에 사무치도록 엄마가 그리웠고 내내 엄마가 다시 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집 나간 엄마가 돌아왔다. 이제는 내 마음을 잠가놓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다. 드디어 엄마를 보러 가는 날, 나는 애써 담담한 척을 했다. 마치 어제도 보고 오늘도 봤다는 양 요란스럽지 않게 이 날을 맞이하고 싶었다.
나와 내 동생은 뒷좌석, 고모는 조수석, 고모부는 운전을 했다. 차 트렁크에는 간소한 짐가방이 실려 있었다. 우리 넷은 엄마가 있다는 그곳으로 한참을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나는 엄마가 기다린다는 곳으로 걸어 나아갔다. 엄마가 있는 곳은 이상하리만치 새하얀 공터였다. 현실 속에 있는 공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물건이며 건물도 없었다. 꿈속인 듯, 천국으로 가는 입구인 듯 그저 모든 곳이 다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눈부시고 따뜻한 빛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분명한 형체 하나가 있었다. 나의 엄마가 분명했다. 이윽고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의 표정이 만개하며 양쪽 팔이 꽃잎처럼 활짝 펴졌다. 나는 그 넓고 아늑한 엄마의 품을 향해 힘껏 달렸다. 내 입에서도 씨앗주머니가 터지듯 단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엄마!!!!!!"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한가득 품에 넣었다. 세 사람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서로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았다. 나와 내 동생은 엄마의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의 눈물도 내 머리 위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날부터 나와 내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살았다. 더 이상 부모가 없는 고아가 아니었다. 엄마가 마련한 보금자리는 성남시 중원구, 오래된 연립주택 지하였다. 작은 방하나가 있었고, 세 사람이 서있으면 꽉 끼는 짝 달 만한 주방, 그 옆에 화장실까지 구비된 완벽한 집이었다. 불을 켜지 않으면 대낮에도 암흑이 되는 지하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사는 집은 8호선 신흥역 2번 출구에서 십여분 정도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었다.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왼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지름길이었다. 엄마는 내가 혼자 다닐 때는 큰길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따금씩 그 지름길을 이용했다.
지름길은 알록달록했다. 지름길 좌우에는 통유리로 된 상가들이 있고 붉은색인지 분홍 빛인지 알 수 없는 빛이 늘 그곳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그곳에 있는 언니들은 통유리 창 안에 서있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으며 때로는 유리 앞에서 배회하기도 했다.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상의 가발을 쓴 예쁜 언니들이 때로는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그 커다란 통유리창 안에서 인형처럼 손을 흔들었다.
엄마와 함께 그곳을 지나갈 때면 엄마는 늘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좌우로 굴려 그 광경을 모두 담았다. 정말 쳐다보지 않고는 못 배길 강력한 힘을 지닌 길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면 정육점이 떠올랐다. 물론 붉은색 빛깔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탓이 크겠지만 살덩이를 진열해놓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지름길을 지나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언덕배기가 있다. 그 언덕배기에는 낡고 허름한 주택들이 마치 숲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협소했는지 집과 집 사이가 경차 한대도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비좁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차를 소유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넘실대는 동네였던 것 같다. 혈혈단신의 사람들이 사는 곳답게 주택의 층수 또한 낮았다. 기껏해야 3층, 4층 정도의 높이의 앉은뱅이 주택 옥상은 그 자리에서 몇 발짝 도움닫기를 하면 옆 건물 옥상까지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옥상에 서서 다른 집 옥상들을 바라보면 그 끝이 마치 능선처럼 길게 이어져 보였다. 훗날 나는 그 옥상에 올라 처음으로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 언덕배기 가장 높은 곳에는 나와 내 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엄마의 직장은 8호선 잠실 롯데백화점. 나와 내 동생은 일하고 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맞이하러 종종 지하철로 마중을 나가곤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나와 내 동생의 마중은 엄마에게 있어 스페셜데이 같았다. 엄마도 그 마중을 꽤 반겼던 것 같은데 엄마를 마중 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꼭 언덕배기 초입에 있는 탕수육 가게에서 탕수육 3000원어치를 사 왔다. 2000원은 좀 아쉬운 듯했고 4000원은 꼭 몇 점 남아서 3000원어치가 셋이 먹기 딱 적당했다.
집에 돌아와 널찍하고 볼록한 그릇에 수북이 탕수육 고기를 쏟아 놓고 뜨거운 소스를 좌르륵 부으면 이곳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안락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하루의 일과를 도란도란 얘기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는 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시시콜콜하고 아주 사소한 일화조차도 그 시간에는 대 서사시가 되어 우리 가족 앞에 펼쳐졌다.
나라는 사람에게서 행복이란 단어의 정의를 떠올리면 가장 처음으로 올라오는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만큼 소중하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순간을 떠올릴 만큼.
이때 처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아이돌 가수 얘기를 했고, 팀을 이루어 장기자랑 준비도 했다. 속셈학원을 다니며 학원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었으며 같은 반에 누가 잘생겼냐는 둥, 그 친구와 그 친구가 서로 좋아한다는 둥 또래들이 할만한 생활을 했다. 방과 후 과정에 있던 사물놀이 패에서 꽹과리로 참여해 연습을 하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동생과 함께 학교 앞 분식집에서 용돈으로 컵볶이를 사 먹고, 피카추 돈가스를 사 먹고 떡꼬치를 사 먹었다.
아주 일상적인, 너무나 평범한 12살 어린이의 일상으로 하루하루가 채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산 기억이 내 뇌리에 크게 똬리를 틀어 자리하고 있다. 12년 생애에 걸쳐 가장 행복하면서도 가장 반짝였던 기억들이다.
하지만 원래 인생이란 롤러코스터 같은 법이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한 바퀴 크게 돌기도 하고 낮은 위치에서 맴돌기고 하고 높은 곳을 빠르게 지나가기도 한다. 우리 가족은 롤러코스터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천천히 가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 훅 떨어져야 그 재미가 톡톡히 치러지듯이 우리 가족의 행복은 앞으로 찾아올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 칭하기에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