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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Oct 08. 2020

서양의 나폴리에 간 동양의 나폴리 사람들

통영이 동양의 나폴리라는 말은 순 뻥인 줄 알았는데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왔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웬만큼 키운 후에 일본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첫 태동을 느낀 후에 완전히 바뀌었다. 태아가 세포가 아닌 '살아 있는 존재'임을 실감한 남편이 아기를 꼭 일본에서 낳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서 낳은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려면 최소 생후 한 달은 되어야 할 텐데, 그 한 달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출산을 했다. 나도 몰랐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엄마가 될 줄은.

 산모 머리맡에서 출산의 모든 과정과 생명 탄생의 순간을 지켜본 남편은 나와 아이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육아는 아빠가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닌, 누려야 할 '권리'라고 주장하며 아이 키우는 일에 나보다 더 깊이 빠졌다. 오랫동안 싱글로 낚시만 하고 살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아빠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생처음 아기를 안은 초보 부모에게 육아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일. 그런 우리 부부를 위해 한국 친정 엄마가 슈퍼맨처럼 날아왔다. 

30년 전 갈고닦은 실력을 되살려 그 어렵다는 '수유 텀 조절'에 성공한 다음, 트림시키기와 목욕시키기 등 각종 육아기술을 전수하고서야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아이 키우는 일상에 적응이 되자 엄마가 떠올랐다. 일본까지 와서 산후조리를 해 준 엄마가 고맙기도, 보고 싶기도 했다. 모녀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남편도 나들이에 찬성했다. 임신 초기부터 유산 위험에 시달리며 마음 편히 외출하지 못했으니, 이제 시름은 놓고 어디든 다녀오라고 했다. 

 이왕 주어진 시간, 색다른 곳에서 보내고 싶었다. 마일리지를 싹싹 긁어 이탈리아행 항공권에 털어 넣었다. 엄마가 된 후에 떠난 첫 여행이었다.






동양의 나폴리에서 성장했습니다만

 어느 나라나 그렇듯 이탈리아도 여행 기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고 가는 날을 제하고 일주일. 

오래간만에 떠나는 여행이기에 특별한 곳에 가고 싶었다.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본 지도에서 도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폴리. 아주 익숙한 지명이었다.


 이사가 잦았던 우리 가족은 통영에 제일 오래 살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통영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를 이방인으로 대하곤 했다. "그러면 니는 외지 사람이네?"하고 물었다.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외지外地.

 통영에서 태어나서 쭉 살아야지만 성골 내지內地인이 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일본에서의 이방인 생활이 낯설지 않은 것은, 이미 생의 긴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외지인'인 나에게 통영이 '동양의 나폴리'라고 소개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자부심으로 눈빛이 반짝였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1962



 청소년기에 들어서자 '동양의 나폴리'라는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조 섞인 우스갯거리가 되곤 했다.

 "통영에 뭐가 있노? 있는기 없다."라고 누군가 한탄하면, 

 "충무김밥 모르나?... 하아...(깊은 한숨)"

 혹은,

 "동양의 나폴리다 아이가 나폴리...(깊은 한숨2)"하고 대답해 주는 것이 정석이었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이 고장이 좁게 느껴질 때 하는 대화였다.

 그 시절의 나와 내 친구들은 누구도 통영이 나폴리처럼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폴리와 통영에 정말로 닮은 구석이 있는지를.





그래서 가 보았습니다. 서양의 나폴리에.

 로마에서 열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했다. 창문 밖으로 커다란 산이 보였다. 엄마 얼굴을 보고 "저게 뭐지?"라고 물으려는 찰나, 맞은편 좌석에 앉은 할아버지가 답했다. "저거, 베수비오 화산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 역에 닿았다. 흥분한 복어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나폴리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가 특히 많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들뜬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역과 가까운 숙소에 짐을 풀고 하룻밤을 묵었다. 날이 밝자, 나폴리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 시절 여고생들처럼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했다.


 "여기가 서양의 나폴리가?"

 "서양의 나폴리가 어딨노? 나폴리는 그냥 나폴리지."

하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무니시피오 Municipio 역에 내려 나폴리 항구를 향해 걸었다. 

 세계적인 미항이라는 나폴리 항을 마주한 순간, "어? 여기 내가 아는 곳인데?" 하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나폴리에서 통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맞은편에 나타난 거대한 베수비오 화산은 흡사 미륵산처럼 보였다. 바다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은 중앙시장에서 해저터널까지 이르는 해안도로 같았다. 산 엘모 성 아래를 빼곡하게 채운 마을은 동피랑과 서피랑을 떠오르게 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나폴리 구석구석을 통영에 무리 없이 대입할 수 있어서.

 박경리 작가가 옳았다. 1960년대 통영 젊은이들이 자신의 고장을 조선의 나폴리라 할 만했다. 

다만, 그것은 바다 빛이 나폴리처럼 푸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 지형에 둘러싸인 듯한 따뜻한 느낌과, 도시 어디에서나 우뚝 솟은 산이 마주 보이는 풍경이 같았다.


 나폴리는 피렌체나 베네치아 같은 다른 관광 도시와는 달랐다. 꽃단장을 한 듯한 예쁜 얼굴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금만 샛길로 들어가도 현지인들이 찾는 과일 가게와 세탁소, 이발소 같은 곳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날 것 그대로의 풍경. 카메라를 들이대기 미안할 정도였다. 골목마다 줄지어 매달린 빨래는 기분 좋은 햇살 아래 펄럭였고, 그 틈 사이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렸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폴리를 통영 같다 느낀 것은 이런 점 때문이기도 했다.

 통영은 말끔하게 단장된 계획도시도, 관광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도 아니다.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보통 사람들의 도시' 다.

 나폴리도 그랬다. 항구를 통해 바다로 나아가는 뱃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있고, 이들은 신사 다움을 풍기기보다는 투박하고 무뚝뚝하되 진솔하다. 나는 나폴리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나폴리에서 피자 한 번 먹어보려 했더니

 그런 나폴리에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한 장면처럼 이탈리아 음식을 만끽하고 싶었다. 남편과 신혼 때 발리를 여행했으니 발리에서 사랑해본 셈 치고, 인도에서 기도도 할 만큼 했으므로 이제 이탈리아에서 먹을 일만 남아 있었다.

 산후 다이어트 같은 것은 잊고,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처럼 먹는 즐거움을 누리겠노라 다짐했다. 낮 동안 나폴리의 먹거리를 빠짐없이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다 미켈레 Da Michele에서 피자를 먹을 계획이었다. 영화에 나온 바로 그 피자집이었다. 


 점심으론 해물이 듬뿍 들어간 스파게티에 와인을 곁들였다. 유서 깊은 카페 감브리누스 Gambrinus에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때리고, 쇼콜라티에 게이 오딘 Gay-Odin에서는 초콜릿 젤라토를 흡입했다. 

핀타우로 Pintauro에서 조개 모양 돌체, '스폴리아텔레'도 샀다. 엄마는 우리가 굶주린 메뚜기떼 같다며 큭큭 웃었다.  


 엄마 메뚜기와 딸 메뚜기는 브랜디 Brandi를 발견하기도 했다.

 붉은 토마토와 초록 바질, 하얀 치즈가 이탈리아 국기를 연상케 하는 마르게리따 피자를 개발한 식당으로, 오직 나폴리에서만 갈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하지만 가볍게 스쳐만 지나갔다. 나는 다 미켈레에 갈 거니까!


 미로 같은 스파카 나폴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는.


 오후 4시, 나폴리 식도락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다 미켈레에 갔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각이니 우리 둘 앉을만한 자리는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식당 앞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허둥지둥 달려가 직원 총각에게 대기 번호표를 받았다.


빨간 종이에 찍힌 내 번호표는 14번. 다행이었다.

 "우리 앞에 열세 팀 있구나. 금방이네?" 하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성급한 판단이었다.

종이의 색깔이 여러 가지였던 것이다!


 빨간 종이 훨씬 이전에 파란 종이와 노란 종이가 있었고, 각각의 종이는 100장에 달했다. 도대체 빨간 종이 14번의 차례는 언제 온단 말인가!

 한 시간이 지나도 우리 번호는 불리지 않았다. 


 나폴리를 떠나는 열차시간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국, 엄마와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 미켈레의 피자 냄새만 실컷 맡은 후였다.




함께라는 것만으로 충분한 여행

 자녀와 함께하는 여행은 장소만 바뀐 육아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아이와 여행하는 것은 부모에게 완전한 휴가가 아니라고들 한다.

 육아라 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지만, 엄마 입장에서 본 나폴리 여행도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나이 서른에 피자 못 먹어 삐진 딸을 어쩌면 좋으리. 엄마는 나폴리까지 와서 덩치가 산만한 딸을 달랬다. 당신 잘못도 아니면서.  

 "괜찮다. 다음에 핫 서방하고 시뽀하고 다시 와서 먹으면 되지."

 입을 삐죽 내민 딸은 앙탈을 부렸다.

 "다음이 있겠나? 어느 세월에 오겠노? 여기까지 왔는데 피자도 못 먹고."


 아, 이것이 진정 효도 여행이 맞을까?


 동양의 나폴리에서도, 서양의 나폴리에서도 엄마는 엄마고 딸은 딸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자연히 성숙해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출산을 한다고 해서 철부지가 갑자기 어른이 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걱정이 됐다. 엄마가 '여행 같이 다니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한 말을 취소할까 봐. 

그러면 안 되지. 황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엄마, 그러면 우리 다음 도시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집 찾아가자."


 그래도 효도는 하고 싶었나 보다.


 비록 피자는 못 먹었지만, 궁금했던 나폴리를 우리 두 눈에 담았다는 것만으로 이 여행의 가치는 충분했다. 

아이를 데리고 엄마를 만나면 온통 육아 얘기만 하지만, 둘이서만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했다.

 함께 웃고, 함께 감탄하고, 함께 아쉬워하며 추억이 늘어갔다. 이 정도면 족했다. '계획한 대로 여행해야 한다'는 강박은 덜어내고, 엄마와 보내는 시간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한결 경쾌해진 열차는 짙푸른 바다와 베수비오 화산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처음 마주했지만, 오래도록 보아온 것 마냥 친숙했던 나폴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항구 너머로 보이는 베수비오 산


왠지 거북선이 떠 있어야 할 것 같은 나폴리 풍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이는 스파카 나폴리


브랜디와 다 미켈레


다른 유명한 것은 다 먹었는데, 왜 다 미켈레 피자는 먹지 못했니


다음 도시에서 먹긴 먹었다. 마르게리타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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