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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Oct 10. 2020

여행지에서 왜 한국인을 피하냐면요

자꾸 물어봐서요, 안 물어도 되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토스카나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을 재밌게 읽은 엄마는 토스카나에 가고 싶어 했다. 안 될 것은 없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궁리 끝에 투어를 예약했다.

 피렌체에서 출발해 토스카나 소도시 '시에나Siena'와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중간엔 포도밭에서의 점심식사와 와이너리 견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출발도 하기 전부터 내 머릿속엔 토스카나 풍경이 넘실넘실 춤을 췄다.


 이른 아침. 피렌체 시장에 나가 투어팀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드와 여행자들이 모여들었다. 소규모 투어라 참가자는 여섯 명. 엄마와 나는 중년 부부 넷과 동행하게 되었다.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남쪽을 향해 한 시간쯤 달리던 차는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멈췄다. 각자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다 점심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엄마와 나는 봄의 시에나를 기웃거렸다. 피렌체에서 본 따뜻한 색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결 앙증맞은 마을이었다.

 시에나에서 엄마는 남의 집 문고리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대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문고리들을 들여다 보고는, 생김새가 어쩜 이렇게 제각각이냐며 신기해했다. 나는 문고리만 보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가 더 신기했다.


 엄마의 소녀스러움에 대한 감탄도 잠시. 해가 머리 위에 떠올랐고, 고대하던 와이너리로 이동했다.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포도나무밭 가운데 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엔 각각의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이 짝을 이루었다.

 그곳에서 중년 부부들과 마주 앉았다. 시에나는 어땠는지, 산 지미냐노는 어떠할지에 대한 가벼운 말로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음식이 나오자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달그락, 포크와 식기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와인잔 너머로 파란 하늘과 초록 토스카나가 보이는, 나에게는 무척 드물고도 소중한 호강의 순간이었다.




토스카나를 배경으로 전국 자기 자랑

 모두가 와인을 한 모금, 두 모금씩 넘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투어 내내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 한 번 본 적 없는 아저씨가 운을 떼었다.


 "저는 얼마 전에 은퇴했어요. 제가 다니던 회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상사 00 물산이에요. 다들 아시죠? 거기. 임원까지 했어요 제가. 다들 무슨 회사 다니세요?"


 선글라스 아저씨의 고개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 나보고 대답하라는 건가?

 "저요? 지금 일 안 하는데요?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됐어요."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아저씨는 재차 물었다.

 "그럼 남편은 어느 회사 다녀요? 와이프 이탈리아 여행 보내주려면 연봉은 좀 되나?"

 

 남편 회사를 알아서 어디에 쓰려는 걸까. 국이라도 끓여 먹으려는 건가.

 "제 돈으로 온 건데요. 남편은 일본인이라 일본에서 일하는데, 이름 말하면 아세요?"

 "그럼 일본에서 학교 나왔어요? 학교는 어디예요?"


 오, 나는 00 물산에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니었다!


 출산 후 처음으로 주어진 여행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세포를 동원해 토스카나를 온몸으로 느끼고 누리고 즐기고자 했다. 그러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이게 웬 뜬금없는 신상털이란 말인가.

 그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 싶어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할만한 비교 대상이자 도구가 필요했을 뿐이다.


 아저씨의 '나 이런 사람이야' 메들리는 피렌체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까지 계속되었다.

 회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자신을 닮은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어떤 연예인들과 친한지, 여행 가방 속에 든 명품이 몇 개나 되는지,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탐내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우리 아이 미래 직업까지 고민해 주었다.

 "애가 아들이에요? 그럼 파일럿으로 키워요. 남자 직업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거든요."


 말을 마친 아저씨는 취기가 올랐는지 코를 골며 잠들었다.




우리 좀 더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없나요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한국 여행자를 만나 봤지만, 친구가 되면 됐지 이렇게까지 피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토스카나에 가기 전 베네치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수상 버스를 타고 무라노 섬에 가는 길이었다. 버스표를 사서 줄을 서려고 하는데 흰머리가 희끗한 한국 어르신들이 길을 물어 왔다.

 70대에 가까운 연세에도 형제자매들이 모여 자유여행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정보를 검색해 알려드렸다. 감사 인사에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차오르려는 순간, 어머님 한 분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아들이 용돈을 많이도 챙겨 줬어요. 우리 아들은 부산대 의대를 나와서 지금은 의사 해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요. 의사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죠? 자식이 의사면 부모가 이렇게 어깨 펴고 다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 이어나가기 매우 어려운 대화였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만난 지 5분밖에 안 된 사이라면 더더욱.


 다행히 우리를 구원해 줄 수상버스가 도착했고, "좋으시겠어요. 그럼 여행 잘하세요!"라는 인사로 난처한 순간을 빠져나갔다. 수상버스에 오른 엄마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서로를 바라보고 허, 허, 허, 하며 맥없이 웃었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이라고 하더라도, '나 이런 사람이야'형 사람을 만나면 이런 일이 생긴다. 

그들은 자신이 돋보일만한 화제가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한국에서 사람들을 줄 세우던 기준과, 타인을 판단하던 시각을 지구 끝까지 갖고 온다.


바로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나고야에서의 장면이었다.

 



나를 피하던 여행자들의 마음, 이제 알게 되었네

 가끔 나고야에서 한국 여행자들을 마주친다. 지하철 표를 어떻게 끊는지 몰라 난처해하는 사람도 있고, 현지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경우도 많다.

 처음 몇 해는 그런 분들을 발견하면 조심스레 다가가 도와드렸다. 그런데, 몇몇 경험이 쌓인 지금은 선뜻 말을 걸기가 망설여진다.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안 여행자들이 "아니요 됐어요." 하며 황급히 종종걸음 치는 일이 왕왕 있어서다.

 처음엔 그런 반응이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 위험한 사람 아닌데. 그냥 동네 한국 아줌마일 뿐인데."하고.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냥 동네 한국 아줌마'라는 점이 문제였다.

나고야에 오는 여행자들은 한국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매력으로 꼽는다. 영사관까지 떡하니 있는 도시에 한국인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최소한 남들이 다 가는 대도시보다는 적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한국인을 마주치기 힘든 곳에 가면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국경을 넘어야지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이 고개를 든다. 외국인이 되어 거리를 걷는 동안 사람들은 우리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서로가 속해있는 세계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유리벽이 사라지면 마음은 끝없는 지평선 위를 내달린다.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다. '한국인 없는 여행지'가 꾸준히 검색어에 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런 상황에 내가 불쑥 나타나 끼어든 것은 아니었을까?

"한국 분이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라는 인사는 내 기준에서만 호의일 뿐, 상대방에게는 모처럼 얻은 자유에 수갑을 채우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일 수 있다.

 

 몇몇 여행자들이 나를 보고 떨떠름해하고, 한국어가 들리면 자리를 피하는 이유를 그제야 어슴푸레 알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까지 굳이 한국인을 만나, 한국에서 하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탈리아에서 겪은 것과 흡사한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게요

 확실히,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를 자유롭게 하기보단 움츠러들게 했다. 또 이런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벽을 치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딘가에서 들려올 한국어를 무작정 피하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기존의 틀에 가두어 인생 점수를 매기려 들 가능성도 있지만, 역으로 시야를 더 너르게 확장해 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유독 운이 나빴을 뿐, 지금껏 좋은 분들을 더 많이 만났다.

 

시민사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꼭 특정 단체나 조직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던 나에게 "저는 1인 활동가예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언니. 첫인사를 나눈 순간 세상이 일시 정지했다. 큰 영감을 받았다.

 이집트 호스텔에서 만난 부산 슈퍼 할아버지 할머니. 60대 후반에 배낭여행하는 모습을 보며 어르신들의 여행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여행도 인생도 이제부터라는 용기가 생겼다.

 그 밖에도 많은 한국 여행자들이 건강한 시각을 갖추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나같이 보석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축 늘어진 마음을 햇살에 널어 뽀송하게 말려 본다. '피하고 싶은 한국인'의 기억은 잊고, 앞으로 만날 분들을 웃으며 맞이하기 위해.


 더불어, 나 역시 '피하고 싶은 한국인'이 되지는 않아야겠다.

세월이 흘러 이름과 얼굴이 가물가물해지더라도, "그때 만났던 그 사람 참 좋았지." 하는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싶다.





토스카나 소도시 시에나 Siena


이 좋은 와이너리에서 왜


그 와중에 아름다웠다. 산 지미냐노 San Gimignano

 

아름다운 곳에서는 아름다운 얘기만 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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