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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Oct 04. 2020

엄마에게 엄마를 배우다

'아내이자, 엄마이자, 나'로 살게 되기까지




엄마가 딸에게 알려준 모든 것

 엄마인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 61년생 허여사다. 우리 허여사로 말할 것 같으면, 비슷한 연령대 아주머니들과는 좀 다른 사람이다. 기억나는 사건을 나열해보자면 이러하다.


 내가 어린아이이던 때, 허여사는 종종 집을 비웠다.

 어릴 적 별명이 '하고재비'(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뜻하는 경상도 말)였다는 허여사. 자식을 낳고도 오만 것들을 배우러 다녔다.


 운전하는 여성이 드물던 시절 당차게 면허를 따 온 허여사는 도예, 다도, 컴퓨터, 사진 찍기, 글쓰기, 야생화 관찰하기, 장구 치기, 요가를 차례로 섭렵했다. 

 엄마의 부재가 쓸쓸했냐고?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재미있게 생활하는 허여사를 보면서 '사람은 저렇게 사는 거구나. 나도 재밌는 걸 찾아서 배워야지.'하고 생각했다. 

하고재비의 딸은 하고재비가 되어 갔다.


 1994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엔 강석경 작가님이 쓴 <인도로 간 또또>라는 책을 선물해주었다. 또또라는 꼬마가 엄마와 둘이서 인도로 떠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동화였다. 책에는 이런 대화가 나왔다.




영모 엄마 : 엄마와 둘이만 인도 간다면서. 왜 엄마는 인도 가신대? 아빠가 선선히 보내 주신대?

또또 : 아빠가 보내 주는 게 아니라 엄마가 자기 두 발로 가는 거예요.

영모 엄마 : 그럼 아빠 밥은 누가 해 드리니. 할머니가?

또또 : 아빤 어른이니까 스스로 밥 할 줄 알아요.

영모 엄마 : 네 엄마가 부럽다. 넌 잘난 엄마를 뒀구나. 난 제주도 여행도 삼박 사일을 못 채웠다. 나 없으면 영모 아빠가 식사를 못 하신다고 난리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을 밥쟁이로만 아나 봐.


강석경 <인도로 간 또또> 1994



 내 나이 일곱 살. 인도든 어디든 '남편이 보내줘서'가 아니라 '자기 두 발로' 간다는 것을, 결혼을 하려거든 스스로 밥할 줄 아는 '어른'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여사는 다른 사람들이 관습이라서 의심 없이 따르는 것들을 한 번쯤 되짚어보는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내게 문득 이런 말을 해주기도 했다.

 "결혼식 있잖아. 입장할 때 보면 신부가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와서 남편 될 사람 손으로 넘겨지잖아? 나는 그게 참 이상하더라. 일생을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된다는 것 같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누가 손을 잡아 주든 안 잡아 주든 알아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하객 패션에 대해서도 오래전부터 의문을 제기했다. 

 "가족 결혼식에 왜 여자 어른들만 한복을 입어야 할까? 양장이 예의에 어긋나거나 전통이 소중해서 그런 거면 남자 어른들도 한복을 입어야 되는데, 양복을 입잖아."

 이 말도 옳았다. 반만년 간 이어 온 한민족의 유구한 전통도 아닐진대, 왜 우리는 이런 관습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굳건한 성역으로 여겨 왔을까?


 일본에 살면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딱 그렇게 한다. 중요한 자리에 남자는 요후쿠(洋服), 여자는 와후쿠(和服)를 입는 것은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생겨난 일본 귀족들의 문화다.

 서민들은 이 복식 문화를 동경했다. 너도나도 흉내 내면서 널리 퍼졌고, 대중화됐다. 이 관습이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와 아직까지 잔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것이 일본 잔재이든 아니든, 보수적인 아빠 집안 어른들은 엄마의 사고를 받아들일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엄마는 친척 언니 오빠들의 결혼식 때마다 '결혼한 여자가 한복을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기나긴 설교를 들었다.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속시원히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전통혼례를 택했다.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의 결혼식이 서구식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도 컸지만, 집안 어른들이 그렇게까지 한복을 좋아하신다면 남자건 여자건 모두 한복을 입고 오시라는 취지에서였다. 갓도 쓰고 오시면 더 좋고.

 

 결혼식 날. 신부인 나는 친구들이 들어주는 가마를 타고 들어가 내 두 발로 걸어 남편 앞에 섰다. 

 여성의 순결을 상징하는 흰 웨딩드레스가 아닌 오색 빛깔로 반짝이는 혼례복을 입었다. 일생에 걸쳐 '아내이자, 엄마이자, 나'로 사는 법을 배운 후에 선택한 결혼이었다. 




부모의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

 허여사는 가난하게 자랐다. 딸은 많고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엄마는 양질의 교육을 제공받기보다는 집안에 노동력과 경제력을 보태는 존재였던 것 같다.

 하지만 허여사는 하고재비. 어린 나이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다달이 월세가 나가는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니체를 읽었다. 결혼을 한 후에도 허여사의 '읽기'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내 유년기는 허여사 무릎에 앉아 책을 읽은 것으로 기억된다.

 나란히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언제나 엄마 책 한 권, 내 책 한 권을 샀다. 엄마가 사준 동화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은 끝에, 따로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읽고 쓸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다섯 살이 되자 두께가 내 종아리까지 오는 <국어대사전>이 생겼다. 어린이에게는 실로 놀라운 세계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말이 이렇게 많다니!" 그 사전은 오래도록 내 장난감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아무 데나 펼쳐서 마구 읽다 보면 시간이 빨리도 지나갔다.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 그 사전 값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는데, 검소한 허여사는 그런 데엔 돈을 잘 썼다.

 그러면서도 그 책들을 혼자 끼고 있지는 않았다. 책꽂이에 책이 불어나면 양서를 추려 100권 단위로 시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책 육아와 미니멀 라이프를 30년 전부터 실천해 온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입 수험생이 되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허여사는 그때도 더 나은 성적표를 갖고 오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해 버렸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허여사가 식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니 자식들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며 즐거워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영어공부에 뛰어들어 또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란 허여사의 세계는 다른 어떤 부모보다 넓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많이도 물려받았다.


 




딸의 인생은 엄마의 인생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허여사는 자신이 못다 이룬 것들을 자식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이루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배웠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했다. 엄마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산 덕분에 나는 내 인생을 침해받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분신도, 인형도 아닌 그냥 나였다.


 허여사의 그런 모습은 다른 엄마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가면 주눅 든 친구들이 많았다. 조심스레 "니 뭔 일 있었나?"하고 물으면, 친구들은 "엄마랑 싸웠다."라는 이야기로 입을 떼곤 했다. 


 "어제 우리 엄마가 내보고 커리어 우먼 되란다 아이가. 뒷바라지 열심히 해 준다꼬, 공부에 목숨 함 걸어 보라면서. 엄마가 못 갔던 대학을 왜 내보고 가라고 하노? 엄마는 영어도 잘하고 싶었는데 못 했대. 피아노도 잘 치고 싶었는데 못 쳐봤대. 그게 한이라고, 그 한을 지금 와서 내한테 풀어 달란다이가? 그래 놓고 이게 다 나를 위한 길이라고 하드라."


 딸과 엄마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엄마의 꿈과 희망과 분노와 좌절을 모두 투사하게 되는. 


 그러나 허여사는 일찌감치 나로부터 독립했다. 자연스레 나도 엄마로부터 독립했다.

 엄마의 인생 과업을 대신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인생을 썼다. 시간의 주인이 된 나는 여행도 삶도 스스로 이끌어 나갔다. 엄마처럼.




여행 같이 가는 게 효도라고요?

 허여사는 내가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말리지 않았다. 덕분에 20대 초반에 홀로 중동과 인도를 돌며 여행을 몸에 익혔다.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둔 시기, 나는 마침내 허여사를 대동해 인도에 갔다. 엄마가 보여주던 동화책 속 그 나라를 함께 찾은 것이다.  

 10kg에 가까운 배낭을 짊어지고, 풀풀 날아다니는 쌀을 먹지 못해 배를 곪으면서도 허여사는 잘 버텼다. 몸도 마음도 힘들 법한 날들을 오히려 즐거워했다. 기차에서 만난 인도 아가씨가 발라 준 매니큐어를 하고, 히피 같은 옷을 입고서 잘도 돌아다녔다.


 한 달간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허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우리 딸 키운 수고 이제 다 보상받았다. 네가 살면서 할 수 있는 효도는 이제 다 했다."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이 일생의 효도라니!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입신양명과는 거리가 먼 딸이다. 부끄러워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부끄러운 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행이 효도가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것도 효도로 쳐주는 허여사가 고마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엄마와의 여행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낙관할 수 없었다. 혹시 나중에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둘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 지속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런 먹먹함을 안고 귀국 편 비행기에 올라 경유지인 태국에 닿았을 때. 거짓말처럼 지금의 남편이 나타났다. 새 등장인물의 출연과 함께 인생의 두 번째 장이 열린 것이다. 


 엄마 밑에서 성장하는 동안 내 의견과 생각, 행동을 존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시각이 길러진 것일까?

 허여사가 나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살게 한 것처럼 남편도 그랬다. 결혼은 나를 바꾸지 않았다. 나를 더욱 나답게 했다.


그 결과, 결혼과 출산을 한 후에도 일 년에 한 번은 허여사와의 여행을 떠난다. 누군가가 '보내줘서'가 아니라, 내 두 발로 가는 것이다. 

 이제는 같은 나라에 살지 않기에 엄마는 김해공항에서 나는 나고야에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탄다. 모녀가 제3 국에서 상봉하는 데에는 나름의 재미와 감동이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엄마 하고재비와 딸 하고재비의 여행.

두 여자의 <엄마 여행 다녀올게>를 이어가 본다.




아직 소장하고 있다.  <인도로 간 또또>


<인도로 간 허여사>


<이탈리아로 간 허여사>


<오사카로 간 허여사>


<하와이로 간 허여사>


<대만으로 간 허여사>


<태국으로 간 허여사>


<또! 인도로 간 허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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