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교토' 다카야마에서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다
일본에 살지만 일본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이왕 휴가가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활용해 다른 나라 문화를 접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휴가가 짧을 땐 일본에서 최대한 알찬 시간을 보낸다. 주로 거주지 나고야와 가까운 장소를 찾는데, 내가 좋아하는 도시는 도쿄도 오사카도 아닌 다카야마高山다.
일본 중부에 있는 다카야마高山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교토 못지않게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분위기가 한결 차분해 '리틀 교토'라는 별명이 붙었다.
교토는 오랜 도읍지답게 대도시다운 면모가 크지만, 인구 6만 명의 소도시 다카야마는 어딜 가나 고즈넉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카야마는 지리적으로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 지역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혼슈를 일주하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꼭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여기에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도야마 알펜루트를 더하면 더욱 훌륭한 코스가 된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배경이 된 히다 후루가와飛騨古川, 일본 3대 온천인 게로下呂, 삼각 지붕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라카와고白川郷도 다카야마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도시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특색 있는 여행지의 집합체다.
그래서일까? 다카야마 젊은이들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여행자들에게 한없이 친절하다.
도시 규모에 비해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이 많으며, 다양한 언어로 양질의 여행정보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 세계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일본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수 차례 찾는 동안 한국분들을 마주친 기억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한두 시간 머물다 스쳐가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한 첫 번째 이유는 외국인들과 우리의 일본 여행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 방문한 외국인일수록 일본을 열흘에서 2주 정도의 긴 일정으로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항공료와 이동시간에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에 한 번 왔을 때 되도록이면 많은 곳을 보고자 한다.
반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말 며칠 정도면 모를까 긴 휴가를 굳이 일본에서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미주, 대양주 등 더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직항 편이 없어서다.
주로 1박 2일, 2박 3일로 짜이는 일본 여행은 공항이 있는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다카야마 산골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도야마나 나고야 공항을 이용해야 하는데, 버스나 열차를 갈아타고 지방까지 들어가는 것은 비용이나 시간적 측면에서 효율이 낮아 방문하기 망설여진다.
세 번째는 우리의 여행이 일정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모험을 원하지 않고, 검증된 여행지를 선호한다. 그래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정보를 얻기 쉬운 도시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루트대로 여행한다. 그 방법이 가장 쉽고 편하다.
나는 세 번째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모두가 문제없이 행복했고, 백 퍼센트 만족했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몇 년 전, 오사카 난바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다.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제대로 탄 '시장 스시'라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에 와사비를 때려 넣었다. 실수가 아니라 악의였다.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시장스시에 대한 나쁜 경험을 공유했지만, 온라인에서 한 번 쌓아 올린 맛집의 탑은 여간해서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 장소'를 '좋은 장소'로 정의했기 때문이었다. 시장스시를 불매라는 수단으로 응징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사카뿐만이 아니다.
도쿄, 교토, 후쿠오카 같은 인기 있는 도시는 물론, 여행지로는 별 인기가 없는 나고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한 번 핫플레이스나 맛집으로 공유되면 모두가 그곳만 찾는다.
바이럴 대행사가 깔아 놓은 덫일까? 거주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의아한 장소가 섞여있을 때도 많다.
나 역시 여행자이기에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의 동선이란 주요 여행지를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고, 현지인이 사랑하는 장소를 안다고 해도 일정이 맞지 않아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룰을 따르는 여행만 할 필요는 없다. 타인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나 스스로가 정보를 만들어내면 된다.
식당 선정을 예로 들면, 내가 여행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1. 가고 싶은 장소를 구글 지도에 찍어 하루 여행 동선을 연결한다.
2. 식사시간에 해당하는 방문지를 지도 중심에 놓고, 인근 식당 전체를 지도에 띄운다. 영업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휴무인 곳과 영업시간 외인 곳을 거른다.
3. 남은 곳을 평점 높은 순으로 정렬한 후, 해당 국가의 모국어 후기를 한국어로 번역해 본다. 후기를 '낮은 평점순'으로 정렬해 불만족 리뷰를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4. 그렇게 추려낸 식당을 트립어드바이저나 SNS를 통해 교차 점검하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곳을 최종적으로 선정해 방문한다.
다소 번거로운 과정일지는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이 과정 자체가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이다. 나만의 여행지를 찾아내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한국어 후기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시장스시보다는 나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게 공들여 찾은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내 입맛에 맞지 않다면 어떻게 할까? 그럴 땐 그 식당이 현지인에게 사랑받는 배경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카야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은 호바미소('호바'라고 하는 나뭇잎에 된장과 채소, 고기 등을 올려 조려 먹는 강된장 같은 음식) 노포 <쿄야京や>라는 곳이다.
가족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식당으로, 현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쿄야는 아무리 유명세를 타도 쉽게 자만하지 않는다. 손님에게 받은 칭찬이나 응원 메모를 차곡차곡 모아 소중히 간직하고, 세월이 흘러 그 손님이 식당을 다시 찾았을 때 과거에 받은 메모를 내어 보이며 눈인사를 하는 섬세함을 갖추었다. 맛과 서비스 모두 감동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식당에 다녀온 방문기를 블로그에 공유했을 때, 내 게시물을 보고 쿄야에 방문한 여행자가 있었다. 그는 장문의 댓글로 분노를 쏟아냈다.
"맛있다고 해서 갔는데 너무 짜서 뱉을 뻔했어요. 어떻게 간도 못 맞추는 식당을 소개할 수가 있죠? 이 글 내리세요. 화가 나네요."라며 나와 식당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나 호바미소 맛이 짠 것과, 이것이 다카야마를 대표하는 음식이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다카야마라는 지역 이름은 말 그대로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위도라도 도쿄나 나고야보다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다. 바다나 평야와도 거리가 먼, 산속에 고립된 마을이다.
그런 다카야마 사람들의 식생활은 어떠할까?
긴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한 식문화가 발달했다. 음식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된장의 염도를 높였다. 채소를 수확하면 소금을 듬뿍 넣어 절이거나 말렸다.
우리나라 음식에 비유하자면 '안동 간고등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내륙에 위치해 있고, 바다와 거리가 멀어 생선을 섭취하기 힘들었던 안동 사람들이 소금을 듬뿍 뿌린 짠 고등어를 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행자가 간고등어를 먹는 것은 안동의 특색을 경험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바미소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의 지리적, 문화적인 특징과 식문화가 발달한 배경을 두루 살피지 않으면
"내 입맛에 안 맞네? 이런 데가 뭐가 맛집이야. 퉤."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고, '무난함'에만 초점을 맞춘 곳만 찾게 된다. 여행지에서 입체적인 경험을 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품을 많이 팔면 팔수록 여행은 풍성해진다.
손품을 팔 때 '다수가 선택한 무난한 곳'이 아닌, '내가 만족할만한 곳', '나에게 의미가 있을만한 곳'을 중심에 놓는다면 더욱 멋진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여행이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식당이든, 도시든, 나라든 그런 기준으로 여행지를 선택하면 열 명의 여행자가 각기 다른 열 가지 색깔의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다양한 SNS에서 '하나의 도시, 하나의 식당'이 아닌 '열 가지 도시, 백 가지 식당'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다.
아무도 모르는 오지로 들어가라는 뜻은 아니다. 직항 편이 있는 도시에서 눈길을 조금만 옆으로 돌려도 보석 같은 장소가 나타난다.
발리 옆 롬복, 푸껫 옆 코 야오 야이, 나고야 옆 다카야마처럼 우리는 잘 몰랐지만 다국적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분명 있다.
조금 헤매어도, 어설퍼도 괜찮다. 여행은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인플루언서의 '인생 여행지'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인생 여행지'를 찾을 수 있도록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