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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결혼을 하는 거야?"

그와 백년해로할 자신은 없지만

by 최민지


"넌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결혼을 하는 거야?"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국경과 나이 모두를 동시에 뛰어넘어 보겠다고 손들고 나서는 인간은 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했을까? 가깝고 깊은 사이일수록 내 선택에 진심 다해 기뻐했고, 멀고 얕은 사이일수록 최민지 앞날 걱정이 극심했다.


결혼 소식에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내두른 친척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불쾌하기보다는 흥미롭게 들렸는데, 비록 얇은 실핏줄이지만 어쨌든 같은 핏줄 가닥을 공유하는 그가 나와 정반대라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통념 속에 들어앉아있는 게 힘든 인간이었고 그는 통념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게 힘든 인간이었다. 아버지께 "여자 직업으로는 00가 좋지."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여자 직업이 뭔데? 다 떠나서 그게 나한테 맞다고 생각하나?" 하고 되물었고 그는 그 일을 했다.

나는 내 특징을 사랑해 주는 파트너를 만났고 그는 그의 특징을 사랑해 주는 파트너를 만났다. 나는 나라서 좋고 그는 그라서 좋은 삶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내가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아도, 설령 그에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결혼은 타인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좋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결혼'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해보기로 했다.

굳건한 자신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핫서방이라는 인물을 나와 같은 나이 또래의 동일 국적자로 대체할 수는 없어서였다.






국수 드시러 오세요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누구보다 닮은 가치관을 가진 저희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의 반려자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섭니다.

더없이 기쁘고 의미 있는 날,

함께 자리하시어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년 5월 16일(토요일) 낮 12시





누구보다 닮은 가치관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두 인간의 지난 10년은, 이 사람 이상의 파트너는 없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하게 만드는 날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 마지막 담임 선생님은 내게 진심 반 농담 반인 메시지를 남겼다.

"민지야.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사고, 그게 너의 장점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은 네가 감당 불가야." 하고.


어른들에게는 나의 어떤 점이 감당 불가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고를 해야지 감당 가능일까? 어른들은 내가 나답기를 바란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다루기 쉬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일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감당 불가'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 시절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나는 그리 대단한 기행을 벌일 만한 인물이 못 된다.

나는 정말 작고 미미한 인간인데도, 고작해야 벼룩만 한 크기밖에 되지 않는 스스로를 잘게 쪼개고 쪼아 가며 부단히 검열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어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입을 앙다물었고, 고유한 색깔이 있어도 그것이 새어 나올까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무색무취가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결혼'을 하겠다는 내가 여전히 감당 불가였을 테지.




그러나 핫서방과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무색무취인 채로 웅크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가진 넓이와 깊이는 나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으니까.

내가 "왼쪽으로 갈래" 하면 "응 민지가 왼쪽으로 가는구나" 하고, "오른쪽도 가볼래" 하면 "그래 오른쪽 좋지." 했다.

끝도 모를 깊이까지 잠수해 보고 싶다고 하면 "그래그래 더 깊이 내려가 봐. 나도 가봤는데 좋더라." 했고, "야 나 이제 좀 날아볼래" 하면 "그래? 그러면 어깨를 이렇게 접었다 펴면서 이렇게 스트레칭부터 해볼래?"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나 행동을 해도, 동서남북 어디로 튀어 다녀도 핫서방이 편안하게 감당할 수 있는 그릇 안이었다. 정말로 자유롭고 진취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생각만으로는 닿을 수 없던 평원에 이르렀고 협곡 위를 날았다.

다도해 바다에서 자란 소녀가 처음 수평선을 본 날처럼,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내 시야를 확장시켰다. 춰본 적 없는 춤이 절로 춰지고, 부른 적 없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스꽝스러운 춤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노래였지만 그는 언제나 큰 박수를 치며 내 등을 다독였다.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너그러이 수용되는 경험이자, 사랑 듬뿍 먹은 힘으로 뛰어도 보고 날아도 보는 날들이었다. 만약 나에게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어떤 매력이 보인다면, 그것은 타고난 내 것이기도 하겠지만 핫서방에 의해 더 선명해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10년이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의 20년 30년까지 장담할 수 있을까. 결혼 인사로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결혼을 하는 거야?" 대신 "축하해. 두 사람 백년해로 하기를 기원할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들 실제로 백년해로를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라에 국운이 있고 일에도 흥망성쇠가 있는 것처럼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 10년이 서로를 구름에 태우고 부드러운 기류를 오르내리며 앞으로 나아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달까. 하다못해 A Whole New World를 부르던 알라딘과 자스민도 영영 양탄자 위에만 올라타 있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 나는 핫서방의 외모에 이끌려 연인이 되었고 생각과 가치관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했는데, 외모의 변화는 얼마든지 수용 가능하며 심지어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머리숱이 적어지고 배가 나와도 상관없다. 그의 얼굴이, 그의 몸이 변해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매만질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고맙고도 영광스러우니까. 시뽀 엄마로서 시뽀가 성장해가는 시시각각을 바라보는 일 만큼이나 소중한 날들이다.


그렇지만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진다거나, 태도가 변화해 나를 통제하려고 든다면?

만약 어느 날 핫서방이 저 깊은 우물 깊이 들어가 개구리가 되기로 자처한다면 나는 기꺼이 개구리 신부가 될 수 있을까. 핫서방이 개구리가 되어도 그와의 백년해로가 마냥 좋은 것일까.


얼핏 보면 '결혼'은 축하할 일이며 파혼 혹은 이혼은 위로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혼의 유지와 지속은 당사자 누구도 파괴하지 않을 때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파혼이나 이혼이 두 사람에게 더 좋은 방향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할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결혼에도 예외는 없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얼마 전 이웃님을 만나 LIKE와 LOVE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어떤 존재의 좋은 점만 보며 기분 좋게 설레어 하는 것은 LIKE이고, 그 존재의 모나고 미운 점까지 감내하며 품어 안는 일이 LOVE가 아닐까요?" 하는 말을 들었다. 수긍 가는 말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는 이제 새로운 누군가의 단점마저 넓게 끌어안는 LOVE까지 할 에너지는 없는 듯하지만, 혹시 나의 배우자가 다른 누군가를 LOVE까지 할 만큼 연모하게 된다면 그건! 진정한 임자를 늦게 만난 경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최민지가 임자인 지 알고 살았는데 아니었네? 여생이라도 그이를 배우자로 맞아 단 한 해라도 부부로 살다 가고 싶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이가 있는데 그럼 안 되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워낙에 신중하고 진중한 성격인 데다 자신의 40대를 아이 키우는 재미에 온통 쏟아부은 핫서방 같은 인간이 저런 선택을 한다면 더더욱 진심을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종종 한다.


아무튼. 결혼이라는 서약을 파기했다고 해서 돌로 내려칠 이유까지는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혼인 신고서에 날인한 도장으로 그를 묶어놓기보다는 우리 두 사람의 선택에 의지해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 지금의 마음이다.


적어도 핫서방과 나의 관계는 그런 것 같다. 이미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사는 관계가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10년 후에도 서로가 서로를 마음으로부터 선택하고 선택받아야지만 유지되는 관계. 그런 우리가 앞으로도 너와 나를 계속해서 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인간이 오늘도 나랑 살아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요지는, 백년해로는 세월이 지나간 후에나 알 수 있을 법한 '결과'라는 것. 백년해로에 대한 확고부동한 자신도 없으며, 백년해로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인 채로 백년해로를 할 수 있으면 기쁘겠다는 것.


"키치, 백년해로라는 말 알아?"

"백년해로? 그게 뭐야?"

"백년해로 몰라? 이렇게 생긴 사자성어인데. 百年偕老."

"모르겠는데. (골똘히 생각) 아! 인간이 백 년을 살면 모두가 노인으로 노화한다는 뜻이지?"

"뭐라고?ㅋㅋㅋㅋㅋㅋㅋ (생각지도 못한 뜻풀이에 대 폭소)"


알고 보니 백년해로는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쓰이는 표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부의 인연이 건강과 장수 속에 한결같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같아서, 「末永くお幸せに。(길이 길이 행복하기를)」라는 표현은 있다고.


웃음이 나왔다. 핫서방 말대로 인간이 백 년을 살면 모두 노인이 된다는 것이 '백년해로'라면, 그런 백년해로만큼은 아주 자신 있는데 말이죠.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밖에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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