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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Sep 08. 2021

설계계약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05

 

판스워스 주택: 미스의 또 다른 주택 대표작. 미국으로 건너간 미스는 판스워스라는 여성의 주말별장을 짓게 된다. 화장실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유리로 완전히 개방한 미니멀리즘 주택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외관과는 별개로 더위와 추위가 극심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영은 그 후로도 건축주와 함께 여기저기 땅을 보러 다녔다. 00시로 가기도 하고, 00시로 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땅들을 돌아보고 공부하면서 ‘아, 단독주택 필지라도 이렇게 조건이 다양하구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도 많은 공부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양수경이라는 건축주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에 뒤져보니 검색이 되는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 꽤나 유명한 보석 업체의 대표라고 했고, 여성지 등에 인터뷰한 기사도 여러 개 나왔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대를 이어 크게 일으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는 식의 풍문도 볼 수 있었다.


‘이 분도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서 하고 있구나..’


물론 사업의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여성으로서 대를 이어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몇 주가 지나고 건축주의 전화가 걸려왔다.


“설 소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


“지난번에 본 땅 있잖아요. 왜 00시 쪽에.. ”


“예. 같이 봤었죠.”


“그래요. 그 땅이 맘에 들어서. 거기로 계약하기로 했어요.”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잘 됐네요.”


민영은 몇 주 전에 갔던 땅을 떠올렸다. 시가지에서 살짝 멀리 있지만 풍경이 좋고 한적한 느낌이 나서 편안했던 기억이 난다. 건축주도 좋아하던 눈치였고..


“땅은 정해졌고.. 이제 설계를 하면 될 것 같은데. 다음 주에 만나서 설계 계약을 하고 싶은데. 설 소장님 어떠세요?”


민영은 ‘드디어 계약하자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는 펄쩍 뛸 듯이 기뻤다. 사실 그동안은 어찌 보면 사전 서비스를 한 셈이고 진짜 설계는 계약을 해야 진행하는 것이다. 민영은 내심 ‘이렇게 간만 보다가 본 설계는 이름 있는 다른 건축가에게 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건축주가 민영을 잘 보았다고 해도 민영은 아무런 실적도 없는 말 그대로 ‘듣보잡’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아.. 대표님 감사합니다. 저는 물론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뭐예요. 설 소장님 설마 내가 간만 보고 계약 안 할까 봐 걱정한 건 아니죠?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하하.”


민영은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움찔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이어갔다.


“아닙니다 대표님. 그런 생각 안 했어요...”


“하하. 농담이고. 그럼 설계비를 얼마로 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설 소장님 견적서 한 장 보내줄 수 있어요? 전화로 말하긴 좀 그렇고.”


“예. 오늘 안에 써서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민영은 견적서를 쓰기 시작한다. 금액을 몇 번 썼다 지웠다 하며 고심을 반복한다. 


“이 정도 쓰면 되려나.. 아냐. 그 정도 부자면 이 정도 설계비는 쓸 것 같은데. 아냐.. 내가 뭐라고.. 이 정도 쓰면 비싸다고 다른 데 갈 수도 있어.. 하.. 진짜 어렵네..”


몇 시간을 고민하던 민영은 마침내 가격을 적고 힘겹게 발송 버튼을 누른다. 모니터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긴다. 


‘계약을 하자고 하긴 했는데.. 금액 보고 다른 데 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아냐. 그 정도 부잔데 이 금액이 비싸다고 할 리 없어.. 음.. 괜찮으려나.. 에휴.’


몇 시간 뒤. 건축주에게 전화가 왔다.


“설 소장님. 저 양수경인데요.”


“예 대표님.”


“견적서 봤는데.. 이 금액 맞아요?”


“네? 예.. 몇 번 확인하고 보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너무 적어서.. 설 소장님. 이 설계 몇 달 할 거예요? 한두 달 만에 끝낼 거 아니죠?”


“예.. 그럼요. 적어도 네다섯 달은 해야죠..”


“자, 그럼 보세요. 소장님이 경력이 있고, 자격증이 있는데, 최소한 대기업 과장 수준으로는 인건비를 받으셔야 할 거 아니에요.”


“예.. 당연히 그렇죠..”


“거기다 회사 운영비, 각종 간접 비용에.. 외주비도 나가야 된다면서요. 그게 소장님 인건비 정도는 될 거고. 그렇게 다섯 달 한다고 치면.. 이 금액으로 되는 거예요?”


민영도 물론 자신이 쓴 금액이 적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력이나 실적이 너무 초라하고, 금액이 너무 비싸면 다른 곳으로 갈까 봐 고민 고민하다 적은 금액이 그 금액이었다.


“하지만.. 제가 경력이나 실적이 너무 적어서.. 일단 그 금액 정도로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에휴. 설 소장님. 제가 자기 가치는 자기가 만드는 거라고 몇 번 말씀드렸는데.. 소장님. 제가 볼 때 이 금액에 두 배는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민영은 깜짝 놀랐다.


“예? 두 배요??”


“왜요. 그 금액도 그리 비싼 건 아닌데. 그냥 여기선 제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음 주 미팅 때 계약하면 될 것 같으니까 그 금액에 맞춰서 계약서 준비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아 예...”


민영은 놀라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제가 설계 요구 조건이나 생각했던 것들 정리해서 한 번 보내드릴게요. 보시고 생각이나 구상 좀 해봐 주세요. 다음 주엔 일단 만나서 계약하고.. 아. 말씀드렸지만 제 아들이랑 같이 살 예정이에요. 아들을 데리고 갈 테니까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뵐 때 초기 배치 대안 정도는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민영은 놀란 가슴을 추스른다. 그것도 너무 많지 않나 걱정했던 금액인데 두 배를 내겠다니.. 이 건축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수경은 전화를 끊고 민영이 보낸 견적서를 계속 살펴본다. 


‘젊은 건축가들이 좀 쌀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거 가지고 사무실이 운영이 될는지.. 쯧쯧.. 아. 지훈이한테 전화해야겠네. 미팅 때 스케줄 비우라고 해야겠다.’


수경은 아들한테 전화를 건다.


“아.. 그래 지훈아.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니.”


“엄마. 지금 작업 중이라서요. 죄송해요.”


“그래, 점심은 먹었구?”


“아뇨.. 이제 대충 먹으려구요. 작업할 땐 리듬이 끊기면 안 좋거든요..”


“밥은 제 때 먹어야지.. 또 빵 같은 거 먹지 말구.”


“예, 알아서 먹을게요. 무슨 일이세요?”


“왜 내가 집 짓는다고 계속 말했잖아. 땅 알아보고.. 대충 정해져서 담주에 설계하시는 분이랑 미팅하려고. 너도 살 사람인데 같이 보면 좋으니까 같이 가자고.”


“그런 건 알아서 하셔도 되는데.. 전 그냥 집에서 쓸 작업실만 있으면 돼요.”


“그런 구체적인 걸 니가 말해줘야 정확하니까 그렇지. 앞으로 안 보더라도 처음 보는 자리엔 좀 같이 가자.”


“에휴. 알겠어요. 담주 무슨 요일이에요?”


수경의 아들 강지훈은 가구 디자이너다. 오늘도 작업실에서 대패밥을 먹어가며 나무와 씨름하고 있다. 민영의 또 다른 건축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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