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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Aug 25. 2021

건축주와의 만남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04

투겐타트 주택: 근대건축의 또 다른 거장 미스 반 데 로에의 주택 건물.

또 다른 대표작인 판스워스 하우스에 비해서는 개방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구획 없이 펼쳐진 평면과 십자 형상의 기둥, 철골 구조 등 미스 건물의 특징들은

고스란히 잘 반영되어 있다. 건물 전후면의 레벨차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어렵사리 현장 답사를 끝내고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 민영은 준비해온 자료를 펼치고 열심히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기본적으로 이격 거리가 있어서 이 만큼은 옆 땅이라 띄어야 하구요.. 주차는 2대 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일조 사선 때문에 이 쪽도 좀 띄어야 하고..”     


민영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건축주는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비웃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기분 탓인가?     


“설 소장님이 보기에 어때요? 이 땅 괜찮은 것 같나요?”     


“예.. 도로도 남쪽이라 일조 제한도 적게 받구요. 햇빛도 잘 들어올 것 같습니다. 00시에 지금까지 이런 땅이 남아있었네요. 운이 좋으신 것 같아요.”     


“음.. 그런 계산적인 것 말고.. 뭔가 감각적으로.. 티비 보면 건축가들 그런 말 많이 하던데. 땅의 맥락이 좋다던가.. 주변의 풍경을 받아들인다던가.. 아무튼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민영은 갑자기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땅은 단순히 법으로만, 숫자로만 분석해서는 안된다, 그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건축은 땅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나는 것이다.. 문제도 땅에 있고 해답도 땅에 있다.. 항상 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였다. 거기에 익숙해진 민영도 학교 설계 시간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교수님들은 항상 고개를 갸우뚱하시곤 하셨다. 실무에 와서는 법규 분석하기에도 빠듯했고..     


“아.. 글쎄요.. 음.. 주변이랑 소통이 잘 되는 게 좋은 땅 같긴 한데요.. ”     


자신이 없는 민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하하. 그 정도인가요. 뭔가 예술가적인 말 잘하는 건축가들 많던데. 설 소장님은 그런 타입 아닌가 봐요?”     

“제가 실무에서 많이 치이다 보니.. 선생님들 하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기가 어렵네요..”     


민영은 건축주가 갑자기 선문답 같은 말을 요구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건축주가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설 소장님은 어떻게 건축을 하게 됐어요?”     


“아.. 저는 아버지가 설계를 하셔서..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구요. 어렸을 땐 아버지가 이런 일 하시는 게 많이 싫었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하고 있더라구요. 하하.”     


민영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는 대답인데, 그때마다 ‘그러게. 내가 어쩌다가 이걸 또 하게 됐을까. 아빠가 이 일 하는 걸 그렇게 싫어했으면서..’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대답을 들은 건축주는 살짝 움찔하는 듯하더니 조금 슬픈 표정이 되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건축주가 말을 이어간다.     


“아.. 아버지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셨어요?”     


“음.. 건축을 정말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일을 정말 많이 하셨고.. 물론 저랑 가족도 좋아하셨는데.. 그런데 그다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셨던 것 같진 않아요. 항상 일은 많이 하시는데 집은 경제적으로 뭔가 부족한.. 정말 어린 제가 보기에도 열정은 넘치셨는데 그만큼 일이 있으셨던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자부심만은 정말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그 점만은 제가 진짜 존경하는 부분이에요.”     


“그렇군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설계사무실을 한다.. 뭔가 보기에 그림은 정말 좋네요. 아버지 방식이 싫었다고 했는데, 설 소장님은 어때요? 개업하고 일 좀 들어와요?”     


“아.. 아직 그렇게 연락이 많진 않습니다만..”     


민영은 차마 ‘연락 온 게 당신이 처음이에요' 란 대답을 할 순 없었다.      


“사업은 결국 영업이에요. 나 자신을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아요. 길거리에 나가서 전단지를 돌려서라도 내 물건을 사게 해야 하는 거예요. 시대가 바뀌어서.. 예술가처럼 내 게 훌륭하고 좋으니 누군가 알아봐 주고 찾아와 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해요. 이 점을 항상 명심하세요. 먼저 사업한 사람으로서 하는 이야기예요.”     


민영은 또다시 건축주의 훈계를 들으며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란 억울한 생각이 들면서도 ‘그러게.. 나도 아빠랑 그다지 차이가 없네..’ 란 반성이 들기도 했다.     


“...”     


“하하. 이야기가 좀 무거워졌네. 저도 이 땅이 나쁘진 않아요. 햇빛도 많이 들고.. 다만 주변에 비슷한 주택들이 많아서.. 좀 한적하게 살았으면 하는데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많아질 것 같긴 하네요. 아직 결정하긴 좀 그렇고.. 부동산에 좀 더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른 땅을 찾게 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때도 오늘처럼 와줄 수 있는 거죠?”     


“예.. 예! 물론입니다. 대표님.”     


“음..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죠.”     


민영은 준비해온 자료와 가방을 챙겨서 쭈뼛 쭈뼛 일어난다.     


“설 소장님.. 근데. 오늘 비용은 따로 안 받아도 되는 거예요? 이러고 들어가면 오늘 하루 다 쓴 거잖아요? 더군다나 주말인데?”     


사실 이 정도 검토나 답사는 영업이나 사전 서비스 차원에서 그냥 해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때문에 민영은 따로 비용 청구를 할 생각을 전혀 안 했었다.      


“아.. 아닙니다. 이 정도는 그냥 해 드려요.”     


“그건 프로의 자세가 아니죠. 당당하게 비용을 청구하세요. 건축사 하루 인건비 적어도 30만 원은 받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공사장 노가다 일당도 20만 원 넘는다는데..”     


“아..”     


“앞으로도 비용은 꼭 청구하세요. 설사 못 받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설 소장님 가치를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건축주 옆에 있던 기사가 봉투 하나를 민영에게 내민다.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고마웠어요. 반가웠구요. 조만간 또 연락드릴게요”     


건축주가 떠나고 민영은 봉투를 열어봤다.     


‘하나, 둘.. 이게 몇 장이야. 생각보다 엄청 많잖아. 웬일이지..’     


민영은 뭔가 앞에서는 냉정하고 모질면서도 뒤로 챙겨주는 ‘츤데레’ 같은 건축주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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