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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Oct 06. 2021

첫 번째 미팅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06

빌라 마이레아: 핀란드의 건축 거장 알바 알토의 주택. 핀란드 특유의 목재와 사우나, 수영장 등을 반영하여 풍부한 건축을 만들었다. 알토의 친구였던 굴릭센 부부를 위한 주택으로, 800여 점에 달하는 스케치와 도면을 통해 섬세하게 만들어진 주택으로 유명하다.




오늘은 민영과 건축주가 첫 번째 미팅을 하는 날이다. 외부에서 현장 답사를 위해서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미팅은 처음이기 때문에 민영은 적잖이 긴장이 된다. 건축주가 말한 금액에 계약서를 준비하고 건물이 어떻게 대지에 앉혀질지를 설명할 배치 대안을 몇 개 준비하면서 며칠간을 분주하게 보냈다.


‘계약할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일들을 직접 하려고 하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


다행히 계약서 문구는 며칠간 메일로 오고 가며 다듬었기 때문에 큰 일 없이 도장만 찍으면 될 것 같긴 했다. 

미팅 당일. 차를 타고 수경이 민영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다른 약속이 있는 지훈은 30분 정도 있다가 따로 오기로 했다. 사실 계약하는 일에 지훈이 올 필요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최대한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놈이 뭔가 없는 약속을 만들어서 이러는 것 같단 말이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말을 안 들으니 원.’


그래도 시간 약속에 늦는 법은 없는 아들이니.. 수경은 일단 민영의 사무실로 들어가 본다. 


상당히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3층이라니..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조심조심 사무실을 찾아가 본다.


‘아무리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는다고 해도.. 이런 데서 일하고 있다니.. 참.’


이윽고 ‘SNOW ARCHITECTURE' 간판이 붙은 문을 발견한다. 간판도 자그맣게 붙여놔서 모르는 사람이 오면 어딘지 헤멜 지경이다.


‘이런 간판도 성격 따라 붙이는구나.. 자신감을 키우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민영이 정신없이 테이블을 닦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도면과 작은 스터디 모형 몇 개가 늘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별 게 없어 화려하진 않지만, 민영의 감각이 묻어있어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사무실이다. 


“아.. 대표님. 이제 오시네요.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1인 사무실이니 당연하겠지만, 청소나 접대 등등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 


“차는 뭘로 드릴까요. 커피나 녹차..”


“음. 그냥 물로 주세요. 준비 많이 하셨네요. 소장님.”


“네.. 조금씩 했습니다, 대표님. 여기 물 드세요.”


두 사람은 계약서를 펼쳐놓고 몇 개의 문구를 다시 본다. 


“이전 번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고쳐졌네요. 계약서는 아무래도 좀 민감하니까.. 제가 좀 까다로워도 할 수 없네요. 그럼 도장 찍을게요.”


드디어 날인이다. 민영은 마음속으로 ‘아.. 이제야 일 다운 일을 하나 하는구나..’라는 감격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래요. 이제 준비하신 안들 좀 볼까요?”


디리리링.. 수경의 전화기가 울린다.


“잠시만요. 아들이네요.. 여보세요. 아 그래. 거기서 좀 더 들어오면 될 거야.. 김기사한테 전화해봐. 근방에 있을 테니까. 그래, 그래. 응.”


아들이 온다고 했지.. 아들은 어떤 성격이려나.. 건축주를 한 명 더 상대해야 하는 민영은 적잖이 긴장이 된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제 아들은 가구 디자인을 하고 있고.. 나이는 설소장이랑 거의 같을 거예요. 서른둘이니까.. 설 소장도 그쯤 되죠?”


“예.. 저랑 동갑인 거 같으신데요.. 전 00년생입니다.”


“아, 그럼 제 아들이랑 똑같으시네요. 하하. 친하게 지내봐요. 어차피 여자 친구도 없으니까.. 왜 이렇게 장가를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채근을 해도.. 이놈 빨리 내보내야 내가 편하게 살지.”


말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뭐야, 건축주랑은 인상이 많이 다르네..’


“안녕하세요, 강지훈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설계사님..”


“얘는, 설계사님이 뭐니. 건축사님이라고 부르던지, 소장님이라고 해야지..”


“아 그런가요.. 아직 잘 몰라서..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모르시면 그럴 수도 있죠.. 호칭이야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차 좀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저도 적당히 물이나 한 잔 주세요.”


민영은 차분하게 준비한 안들을 설명했다.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건물의 전체적인 위치나 모양 등을 대략적으로 검토하는 수준의 계획이다.


“이 안은 좀 더 주변 조망을 좋게 하려고 테라스를 좀 넓게 뒀고요.. 그러다 보니 2층은 면적은 좀 좁아질 수 있는데, 테라스가 넓으니까 상쇄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 안은 테라스가 거의 없고 좀 뭉쳐진 안인데, 마당이 넓어지는 것은 좋다고 봤습니다..”


민영은 준비해온 안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수경의 얼굴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뭐야, 좋다는 건가 나쁘다는 건가.. 계약은 벌써 했는데.. 설마 그만두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설명을 끝내자 잠깐의 적막이 흐른다. 뭔가 좀 어색한 분위기다.


‘음.. 저 건축사? 분이 뭔가 열심히 해오신 것 같긴 한데.. 엄마는 왜 저러시지? 맘에 안 드시나?’


지훈은 수경의 낌새가 뭔가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설 소장님. 열심히 해오신 것 같긴 한데.. 음. 이게 다인 가요?”


“예? 예.. 대안 3개 정도 준비했는데.. 맘에 드는 게 없으신가요?”


“그건 제가 소장님께 묻고 싶은 말이네요. 소장님은 이 중에 맘에 드는 게 있으세요?”


“예? 음.. 전..  첫 번째나 두 번째 안 정도가 어떨지..”


“어떨지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좋은 게 있냐는 거예요. 그냥 구색 갖추기 식으로 그림 3개 만들어 오신 거 아니에요? 이런 것들은 설계하는 사람 누구나, 아니 학생한테 맡겨도 해올 법한 것들 아닌가 해서요. 아닌가요?”


“아.. 그 정도는.. ”


생각지 못한 건축주의 질책에 민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조금은 평범한 안 들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 대지 조건에 합리적인 대안은 이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제가 소장님 제안한 설계비에 두 배 말씀드린 건 이런 적당한 그림 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소장님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있었으면 해서 금액도 충분히 드리려고 한 건데.. 오늘 보여주신 건 사실 잡지나 인터넷 뒤지면 금방 나오는 그런 것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아직은 초기 검토니까 대략적인 걸 먼저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구요.. 디테일한 부분을 검토하면서 좀 더 특징적인 것들이 드러나게 될 거예요.. 대표님..”


“디자인이라는 건 한눈에 독창적인 게 드러나야 생각해요. 제가 하는 주얼리 업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대략적인 배치나 모형에서도 그런 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실 줄 알았는데.. 아님 제가 설 소장님을 너무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 아닙니다. 대표님. 다음 미팅 땐 좀 더 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당황한 민영이 어쩔 줄을 모른다. 건축주가 이렇게까지 압박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엄마가 이렇게까지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해온 것 아니야? 첫 미팅인데 얼마나 대단한 걸 해오겠어.’


“음. 오늘은 준비해 오신 게 이 정도니 어쩔 수 없지만.. 좀 실망이네요. 다음 미팅이 이 주 뒤죠?”


“예, 대표님..”


“그래요. 그때 다시 보죠. 그때도 오늘처럼 해오시면.. 글쎄요. 계속 설 소장님이랑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아무튼 오늘은 고생하셨고요. 착수금은 바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는 민영을 뒤로하고 수경과 지훈은 사무실을 나선다.


“엄마, 처음인데 저 이상 해올 게 있나요? 전 건물 디자인은 잘 모르지만 앞으로 차츰 뭔가 나오겠죠. 너무 심하게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맞아, 좀 심하게 말했어.”


“네?”


“저 친구가 너무 세상 물정도 모르고 주변에 휘둘리는 성격이니까.. 초반에 좀 세게 말해 본거야. 이런 것도 경험이니까. 앞으로 집 짓다 보면 힘든 일이 얼마나 많겠어. 열심히 해왔던데. 사실 맘에 든 부분도 있었는데 일부러 혼을 좀 냈지.”


“아.. 그래도 좀 심하신 거 아니에요?”


“얘가.. 네가 나 회사에서 사원들 혼내는 거 못 봐서 그래. 완전 혼이 빠지도록 만드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튼 좀 정신 차리면 다음 미팅 때 잘 해오겠지.”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는 민영은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내 딴에는 밤늦게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준비한 것들인데.. 첫 건축주에게 이런 소릴 듣다니.. 내가 설계에 이렇게 소질이 없었나? 다른 건축사들이면 나보다 나은 걸 들고 왔으려나? 다음 미팅이고 뭐고 타절 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심란한 마음에 간신히 사무실을 정리하고 민영은 집으로 힘없이 터벅터벅 돌아왔다. 


“민영아, 이제 오니. 오늘 미팅한다면서.. 첫 미팅인데 잘했어?”


“아.. 예.”


“왜? 무슨 일 있어? 잘 안됐니?”


“오늘은 좀 쉴게요.. 죄송해요. 내일 말씀드릴게요..”


민영은 가타부타 설명하기도 피곤하고, 그저 드러누워서 자버리고 싶은 생각뿐이다.


지훈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낮에 일이 계속 생각났다. 젊은 여자 건축가가 ‘멘붕’이 돼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너무 불쌍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음.. 명함 받은 게 있는데.. 괜찮다고 문자라도 하나 보내야 되나.. 아냐. 완전 오지랖인 거 같은데.. 아.. 어떡하지..’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오늘은 고생하셨어요. 충분히 열심히 하신 것 같은데.. 저희 어머니가 너무 엄하시네요. 다음 미팅 때 준비 잘하셨으면 하네요. 파이팅! 하세요 ^^’


이런 문장을 썼다 지우는 걸 반복하고 있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다 되어간다.


‘지금 안 보내면 자버릴지도.. 이상한 생각하고 작업 건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아..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을 하고 있지.. 그냥 안 보내도 되는 건데.. 그냥 자자!!’


고민 고민하던 지훈은 결국 발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아.. 진짜 보내버렸네.. 하.. 괜찮은 걸까..’ 


민영은 일찍 누웠지만 낮에 일이 마음에 걸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뒤척이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문자가 왔다.


‘어 뭐지. 모르는 번호인데..’


‘안녕하세요. 낮에 인사드린 강지훈인데요. 오늘은 고생하셨어요. 충분히 열심히 하신 것 같은데.. 저희 어머니가 너무 엄하시네요. 다음 미팅 때 준비 잘하셨으면 하네요. 파이팅! 하세요 ^^’


‘아.. 건축주 아드님이구나.. 이런 문자를 다 보내다니.. 의외인데... 그래도 고맙네.. 이렇게라도 위로를 해주시다니..’


문자를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지훈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 띠링~ 답장이 왔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했던 탓이죠.. 좀 더 열심히 했었어야 하는데.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준비 잘하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착하신 분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손님이니까.. 사무적인 태도일 수도 있지만 글에서 뭔가 따듯함이 느껴진다.


‘네, 건축사님 힘내시고요. 다음 미팅 때 뵙겠습니다.’


문자를 받은 민영은 지훈이 겉보기보다 참 다정한 성격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건 엄마를 닮은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건축주의 행동을 볼 때  첫 미팅이라 민영을 고의로 압박한 건 아닐까? 란 의심도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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