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하지만
외로움은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이야기의 화두가
되며 언어의 역사상 가장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건강한 고독'
고독을 주제로 한 많은 책이 팔리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하고 '혼'이란 글자를 붙인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원래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을 느낍니다. 하나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 바로 유대감입니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공포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 이른바 낯선 사람 공포증( xenophobia)
그래서 인간들은 고정적이고 친숙한 인물로 소규모 집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그렇게 가족과 사회를 만들어오며 현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이전보다 더욱 규모를 줄이고 있습니다.
사회는 무리에서 혼자인 인간들로 재편되면 여러 명과 연결되어 있지만 혼자로 존재하는 삶으로 변신 중이죠.
이는 단순 유행이 아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될 것이며 , 미래사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지구 상에 무리가 아닌 점처럼 존재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 무수한 '나'는 외로움이란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나라는 고슴도치
네덜란드의 동화작가 톤 텔레헨의 책 '고슴도치의 소원' 이야기.
가을 어느 날
누구도 초대해본 적이 없어
항상 혼자였던 고슴도치는 보고 싶은 동물들을
집에 초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썼지만
다들 못 온다고 할 거란 생각을 하며
편지를 끝내 보내지 않는다.
"외로움은 나에게 속한 거야, 내 가시처럼"
막상 그들이 온다면 고슴도치는 불편할 것 같았다.
걱정할 일이 없어 안심도 되었지만
슬프기도 했다.
그는 날이 어둑해지며 쓸쓸함을 느낀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중얼거린다.
몇 년 전 저와 같은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이미 혼자인데.... 혼자이고 싶어"라고 말했던...
"그런데 그래서 외로운데 그게 편하기도 해"
라고.
혼자라서 외롭고 그런데 함께면 불편하고 힘들까
걱정하는 사람. 그게 나라고 생각했었지요.
원래 고슴도치는 외로움의 상징입니다.
자기를 보호하는 가시 때문에 타인 곁에 다가갈 수 없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
그런 고슴도치도 그만의 생활이 있습니다.
수많은 가시를 뽐내며
때로는 나를 두렵게 하는 이에게 내 가시가 이렇게 날카롭다고 허세를 부리고
나를 안됐어하는 이에겐 난 이런 가시가 많은 강한 존재라고 강한 척을 하는 거죠.
또 다른 고슴도치를 만나면 우린 서로에게
잘 살고 있는 당당한 고슴도치 인척 하며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같은 고슴도치와도 다른 이들과도
일정 거리를 둔 체 자신의 가시와만 가깝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비가 오는 저녁에
할 일이 없는 주말 오후에
나의 가시를 거울에 비쳐봅니다.
외롭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가시가 사라지면 더 행복해질까?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나를 보호해줄 가시가 없어도 난 괜찮을까?
라고.....
나라는 사회적 동물은 관심받고 싶고 너희들이라는 또 다른 이에게 애정의 대상이 되고 싶고
그리고 함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왜 누군가 다가와주기 전엔
손 내밀지 못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엔 외롭지만
이 외로움이 편하다는 결론을 낼까?
외로움의 원리
거절이 존재에 거부로 인식되는 데에는 상대방에게서 오는 , 즉 외부에서 나(내부)로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반응보다
오히려 나에서 외부, 타인에게로 향하는 반응이 더 크게 작용합니다.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익숙지 않은 나는 상대의 반응을 지나치게 많이 염두에 두게 됩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이 일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면 상대는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 내가 아끼는 그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어 '라고.
이것은 때론 배려가 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알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을 이미 상처라고 규정하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될지 쿨하게 '알겠어 난 괜찮아'라고 넘어갈지는 결국 상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절에 무거운 의미를 두면
내가 거절을 당했을 때 역 펀치를 맞게 됩니다.
그 거절이 너무 아파서 나란 존재가 거부당하는 듯 느껴지고 더욱 움츠러들게 마련이죠.
상대는 단순히 여건이 안돼 거절한 것뿐인데도 말입니다.
즉 타인을 향해 나의 좋고 싫음을, 나아가 거부를 밝히는 일은 타인을 향해 문을 여는 일까지 이끌게 됩니다.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는 상대에게 판단하게 하라! 미리 반응을 규정하면 당신은 더욱더 문을 열수 없게 된다.
단절이라는 만성질환
어느 금요일 밤 혼자 카페에 간 적이 있습니다.
많은 혼자인 이들이 점처럼 중간중간 섞여 앉아 있었습니다. 취준생처럼 보이는 이는 노트북 키를 두드리느라 바빴고 중년의 남성은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보는 이들도 몇몇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카페의 전원이 나갔습니다.
당황한 수많은 사람들.
옆 테이블의 여자분과 저는 동시에 웃었고 마주 보며 웃었습니다. 말도 한두 마디 주고받다 불이 다시 켜졌습니다.
정전처럼 주위와 연결된 느낌이 사라져 깜깜한 상태.
외로움의 문제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절감입니다!!
외롭다고 반드시 단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을 인지하고 대하는 자세에 따라 단절감은 누군가에겐 따라붙어 만성질환이 되기도 합니다. 단절은 여러 부작용을 낳으며 고립시키기도 하고 더 나아가 상실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단절감을 느끼는 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힘들어합니다. 단순히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닿아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없는 그 시간을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과 끊어져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 시간, 이장소, 이 상황에선 반드시 무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티브이에서 흔히 보아왔고 타인들이 그러했다 하고 sns에서 화사하게 보이는 그 장면들이 당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가 그래야 한다고 정해놓은 규칙은 없습니다.
금요일 밤에 혼자 술을 마시고 토요일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가지 말라고 한 이는 없죠.
외로움을 두려워하며 혼자 있는 것을 피하려는
누군가의 시선에 당신을 맞추지 마세요.
무리를 이루지 않은 체로 접하는 집 밖의 세상은 생각보다 평온하고 특별할 것도 없고 그렇게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가 혼자 있는 나를 안됐어한다는 생각이 나란 사람을 얼마나 얽매고 있는지 알 기회를 가져보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냥 편히 소파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 주말에 혼자인 게 힘들다는 생각으로 나를 가두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세요.
카페의 그 취준생은 실은 집에서 가족들에게 받을 눈치를 감당 못해 카페에 나온 것일지도, 중년의 남성은 텅 빈 집에 들어가기 싫어 시간을 때우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을 혼자 느긋하게 보내러 온 사람 눈엔 그들도 같은 이유를 가진 사람일 테고 단절감을 느끼는 사람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혼자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왜 혼자 카페에 있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건강한 고독
인도의 위대한 현자 비자야난다는 스승에게서 히말라야 산속에서 혼자 지내며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리곤 히말라야의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 17년을 지내고 돌아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자유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감히 내가 그가 보낸 17년의 시간을, 그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그는 혼자이어도 사람들 속에서도 자유를 느꼈고 남은 평생을 다른 이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나누어주며 보냈습니다.
그의 진정한 자유란 혼자 있어도 충족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보이는 혼자라는 것에 대한 많은 책들은
고독을 즐기고 혼자 있는 시간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걸 하라는 일종의 시간 보내는 법을 이야기해주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 우선은
무엇을 하던 하지 않던
당신이 가진 그 혼자인 시간과 익숙해지고
담담해지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건설적인 무언가를 하건 하지 않건
그저 담담히 단절감과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
나를 볼 타인의 시선에 위축감을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보내기 시작해보길 바랍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괜찮다면 일단 당신의 혼자, 고독은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혼자임에 담담해지면 의외의 일이 생깁니다.
바로 타인에게 다가가기, 말 걸기가 더 편해진다는 것입니다.
혼자라는 위축감에서 벗어난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덜 받게 되어 누군가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렇게 나의 고독이 건강하다고 느낀 후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기사에서 ㅇㅇ팟 이란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혼자 고기 먹기 싫을 때
혼자 노래방 가기 싫을 때
인터넷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모인 사람들은 원하는 행동을 함께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까지 해서 노래방에 가야 하나, 고기를 먹어야 하나....라고. 분명 새로운 용어, 사회적 현상이긴 하나 부정적으로 너무 절박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관계에 , 친구라는 타이틀에 너무 큰 의미를 둘 때 인간관계는 더 어려워지고 누군가를 만나기는 훨씬 힘들어집니다.
한번 같이 밥을 먹은 사람과 우리가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해야만 하는가?
그 시간 동안 배려와 진심을 가지고 대한 후 서로의 길을 가는 것.
즉 타인을 만남에 있어 기존의 정해진 범주로 묶고 오랜 기간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면 당신의, 나의 주변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계속 보고 싶고 조금 더 자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갈 것입니다. 그렇게 가볍지만 열린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너라는 고슴도치와 나라는 고슴도치가 어떤 시점, 어떤 장소에서 만나게 하는
우연과 인연의 시작입니다.
혼자가 아니며 혼자로 살고 혼자로 존재하며 함께 살이 가는 것.
그것이 앞으로 사회의 많은 이들이 인간관계에서 처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소심하고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던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여러분에게 초대장을 보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