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겁니다.
원래 인도의 우화로 동화책으로도 출판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습니다.
장님과 코끼리가 만나면..... 원래 이야기
여섯 명의 장님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육지에서 가장 큰 동물이 코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한 번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인도의 한 왕은 어느 날 장님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의 생김새를 가르쳐주기 위해 궁궐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신하에게 코끼리를 끌고 오게 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만져 보게 한 후 왕은 물었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느냐? "
첫 번째 장님이 손을 더듬어 코끼리 옆을 만지게 되었습니다."이건 마치 벽 같아요."
두 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이빨을 만지게 되었습니다.그러고 나서 그는 말했습니다.
"넌 틀렸어. 코끼리는 전혀 벽 같지 않고 창과 같이 날카롭다."
세 번째 사람은 우연히 코끼리의 코를 잡게 되었습니다.
"당신들 둘 다 틀렸어." 그는 말했습니다.
"확신하건대, 이 코끼리는 뱀과 같아."
네 번째 사람은 팔을 뻗어 코끼리의 다리들 중 하나를 느껴보았습니다.
"오, 이 장님들아!"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나무같이 둥글고 높다는 걸 알 수가 없단 말이냐?"
다섯 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짐승은 당신들이 이름 붙인 그 어떤 것들과도 같지 않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건 커다란 부채 같아."
여섯 번째 장님은 우연히 코끼리의 꼬리를 붙들었는데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오 어리석은 사람들아! 당신들은 감각을 잃어버렸을 거야. 당신들이 좀 더 판단력이 있었다면,
당신들은 이것이 밧줄 같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여섯 명의 장님들은 하루 종일 자기 혼자만 옳고 나머지들은 모두 틀렸다는 자기 의견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 옳다는 독설이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그런데 장님들은, 우리들은 왜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일 수밖에 없을까요?
현상학적 장
에드문드 훗설(Edmund Husserl)은 현상학이라는 철학 사상을 내놓았는데 이는 후에 인간주의 심리학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인간주의 심리학을 주창한 칼 로저스는 현상학적 장(phenomenal fiel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특정 순간에 한 개인이 지각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같은 현상이라고 해도 개인에 따라 다르게 지각하고 경험하며 그것이 그 사람만의 세계, 경험적 주관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도 다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게 되고 모든 인간이 이렇듯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죠.
경험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세계이며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개인적 현실, 즉 현상학적 장만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한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고유한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자란 두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현재는 다릅니다.
한 명은 과거의 자신이 학대당한 것은 나쁜 부모의 탓이며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나만의 훌륭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룹니다.
다른 한 명은 나는 학대받고 자란 어린 시절이 너무 나를 힘들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나의 인간관계는 원만치 않으며 자신은 불행하고 누구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 버겁기만 합니다.
프로이트가 과거 경험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본 점과 달리 로저스는 현재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개인의 현재의 해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과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두 개의 다른 관점이 현재의 두 개의 다른 삶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현상학적 장이란 지금 이 순간의 경험뿐만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한 개인의 절대적인 준거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명의 장님이 조금은 이해되지 않나요?
그리고 때로는 내 마음을 몰라줘서 원망스렀웠던 사람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하지 않나요?
각자의 현상학적 장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 보이기도,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 코끼리부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른 우리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장님과 코끼리가 만나면.... 또 다른 이야기
Javier Tellez라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한 예술가는 2007년에 한 흑백 다큐멘터리 필름을 찍는데
브루클린의 macarren park의 수영장에 여섯 명의 남자를 불러앉혀둡니다. 잠시 후 그들 앞으로는 코끼리 한 마리가 다가오나 그들 중 아무도 코끼리를 볼 순 없습니다. 여섯 명 모두 위의 우화에서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처럼 한 명씩 코끼리를 만져봅니다. 한 명은 두려워했고 크기에 놀란 사람도 있었으며 누군가는 '너는 참 아름답구나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화에서 처럼 그리고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코끼리를 만납니다.
몇 장의 사진일 뿐이지만
위의 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줍니다.
우화를 그대로 구현해낸 이 다큐멘터리 속 여섯 명에게선 설렘과 호기심 그리고 열정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달랐던 걸까요?
첫째로 독선과 아집이 없이 순수하게 미지의 세상과 만났습니다.
이들에게도 첫 번째 이야기의 장님처럼 코끼리는
각각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궁금증과 열린 마음으로 코끼리와 만났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에도 오직 온전한 자신만의 감상과 경이를 표현했습니다.
독선과 아집은 서로의 의견을 표현할 때 빛을 발합니다. 두려웠고 즐거웠고 행복했노라 자신의 마음을 타인과의 비교 없이 의식 없이 말하고 받아들였기에 이 영상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세상과 만날 때 자신의 룰과 시각을 접어야 그 사람의 곁을 얻고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해야 한발 더 다가설 자격을 얻게 됩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코끼리(세상)와의 교감입니다.
'너는 참 아름답구나.'
'다음에 또 봐'
이들은 코끼리에게 그렇게 말을 건넸고 코끼리도 그들이 만질 때 얌전히 있어주었습니다.
언제나 미지의 세계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 대상이 코끼리이건 또 다른 사람이건 간에요.
보이지 않는 것에 손을 내미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가는 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에게나 또 다른 미지의 세계인 , 코끼리 즉 '당신'이 필요합니다.
두렵지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다른 대상을 알아본다는 건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너라는 세계를, 우주를 이해해
얼마 전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의 어떤 행동으로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왜 이렇게 대했을까?
단지 서운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참고 넘기면 되는 걸까?
이 글을 쓰며 나는 과연 그 친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가깝다고 친하다고 친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나는 과연 그 사람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내가 붙여놓은 이름에 맞추어 특정한 리액션을 그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진 않는지.
오랫동안 알아왔다고 그 사람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군가를 이해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너무 쉽게 생각해온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단순히 동공에 맺힌 상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 사고로 이루어진 틀에 맺힌 그 사람의 우주니까요.
각자의 주관적 경험으로 그리고 그 해석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어쩌면 결코 같은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우리들.
누군가에겐 영원히 코끼리는 부채일 테고 누군가에겐 나무 일 테지만 그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우주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이해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