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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이진 Apr 02. 2022

[#22 모로코의 시골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2018.12.)

예산을 아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배낭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돈을 써야 그 여행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때가 있어.

모로코 에사우이라의 숙소가 그랬어. 이 긴 타국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30대 백수는 선뜻 좋은 숙소를 잡기가 부담이 되었지. 그러면서 또 개인 공간을 가지고 싶으니까 3-4만 원대의 저렴한 독방을 찾다 보니 축축하고 빛이 안 드는 옥탑방을 가게 되었지. 물론 예약할 때는 몰랐어. 사실 모든 사진은 사람이며 사물이며 할 것 없이 필터와 포샵이 8할이잖아. 그 어두운 곳에서 억지로 3일을 지내고 나니까 내 몸에 곰팡이가 필 것 같아서 돈을 쓰기로 결심했어.


기존 숙소에서 5분 거리인 바닷가 앞의 호텔로 가서 바로 체크인을 했어.

모든 침구류는 뽀송뽀송, 욕실에는 어메니티 세트가 쪼르륵,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전화기만 들면 모든 서비스를 해결해주는 호텔에 들어가니 갑자기 신분이라도 상승한 것 같았어. 포근한 침대에 잠시 누워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살짝 맛보다가 밖으로 나갔지. 며칠 전 친구가 된 모하메드가 일하는 서핑스쿨은 더 가까워졌어. 동네 마실 가듯 그 서핑스쿨에 자꾸 들락거리니까 사장 나빌은 내가 되게 서핑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나 봐.


"오늘 가게를 마치면 보드를 싣고 서핑을 하러 좀 멀리 갈 건데 같이 갈래?"


오, 공짜로 서핑도 하고 차 타고 멀리 갈 수 있겠다 싶어서 바로 그러겠다고 했지. 약속한 시간에 서핑 샵으로 가니까 나빌이 짐을 싣고 있었어. 나는 당연히 모하메드도 같이 가는 줄 알고 오케이 한 건데 그가 다가와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모하메드, 너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아니, 나는 못가."

"오늘 일 끝났잖아. 나는 너도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나빌은 사장이고 나는 직원이잖아. 남아서 정리해야 돼."


순간 아차 싶었어. 난 어차피 외국인이고 모하메드나 나빌이나 모두 친구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게 아닌 거지. 그렇게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에 내 짐은 나빌 차에 실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빌과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 갑작스레 단 둘이 가는 게 어색했지만 금방 적응하고 모로코의 풍경을 즐겼어. 나빌은 서핑 전문가이니까 파도가 높은 곳을 찾아다닌다고 했어.


그렇게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린 후, 사이디 카오우키 해변(Sidi Kaouki beach)이라는 곳에 도착했어. 초보자인 내가 강사의 도움 없이 혼자 서핑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큰 곳이었지만 아가디르에서 서핑을 더 하고 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일단 물에 들어갔지. 나빌은 생각보다 파도가 작다며 아예 물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 역시나 나는 계속 물을 먹었고 파도를 잡지 못했어. 그냥 또 다른 해변에서 물에 들어간 것에 만족하며 나빌과 함께 일몰을 보고 차도 마시고 별도 보았어.


사이디 카오우키 해변(Sidi Kaouki beach)


그 해변에서 나빌의 전 프랑스인 여자 친구 이야기도 듣고, 서핑샵을 차리게 된 이야기 등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길은 조금 무서웠어.


모로코의 시골길, 상상도 못 해봤을걸? 정말 아무것도 안 보여.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는 곳에 불빛이라고는 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전부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을 그런 길이었어. 사람을 경계하는데 서툴고 겁 없는 나도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여기서 내 옆의 이 남자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는 어떻게 도망쳐야 하나, 그나마 나빌이 체구가 작으니까 다행이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랑 완력 차이가 엄청난데, 낌새가 이상해지면 바로 차에서 뛰어내려야 하나, 여기 주변이 온통 깜깜한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이런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철저히 숨긴 채, 나는 그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꾸준히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어. 그러다 보니 마을이 보이고 조금씩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휴.'


한숨 돌리는 사이, 그가 말했어.


"바로 저쪽에 우리 집이 있어.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고 영화 보고 가도 돼."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어.


"아, 그러면 재밌겠다. 그런데 나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 아가디르에서 만났던 모로칸 부부랑 곧 만나기로 했어."


나는 약속 장소까지 말해주며 그들과 연락하는 내용을 일부러 그에게 말했어. 그들과 진짜로 약속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어. 나를 호텔 앞에 내려주며 그가 말했어.


"일정이 끝나면 연락해도 돼. 내가 데리러 올게."

"응, 고마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야.'를 육성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날 확실히 깨달았어.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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