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지 (8)
좋은 기회로 독립출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무려 나라에서 하는 거라 책 제작비도 지원해준단다. 내가 한국에 없었다면 이런 기회는 얻지 못했을 텐데, 당시에 제일 탐나 보이던 길이 나중에 돌아보면 생각보다 별거 아녔음을 깨닫는다. 따릉이 광팬인 내 동생 덕에/때문에 한 달 전부터 나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은 좀 추워졌지만, 10월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중랑천 옆을 달리는 게 얼마나 후련하던지.
책을 만들기 위해 메모장에 이제껏 써 온 아이디어를 뒤적이며 소재를 찾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을 동요케 하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난 또 열심히 자전거를 탔다. 이렇게 그림이 안 그려질 때나 생각의 길이 턱 하고 막힐 때가 있다. 새하얀 종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느니 집 밖에 나가 그림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 오후 2시쯤에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굴리며 허벅지가 아프다 생각하고 있던 중에 문득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를 참여할 때마다 친구와 함께 내 부스에 찾아와 준 사람이었다. 두 명은 항상 함께 페어를 방문해 본인들의 초상화를 다양한 작가들로부터 모은다고 말했다. 그들만의 전통인 셈이다. 사실 당시에는 이 말을 듣고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며 이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그 순간부터 책의 내용을 이렇게 저렇게 해봐야겠다 하는 생각들이 레고 마냥 착착 쌓아졌다. 왜 지금에서야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다양한 작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모으는 한 사람의 모습이 내 색깔을 찾아가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 현재의 내 모습과 어떠한 접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무튼, <초상화를 모으는 여자>는 말 그대로 본인의 초상화를 모으고 다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친구에게 작업한 페이지들을 몇 장 보여줬는데, 여자가 나 자신이냐고 물어봤다. 귀신같은 사람. 의도해서 인물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닌데 내심 나 자신을 염두하며 그렸나 보다. 굳이 따지자면 이야기 속 여자와 작가 둘 다 나다. 딱 맞는 옷을 찾듯 본인의 초상화를 찾고 있는 여자나, 그런 여자의 원대한 꿈에 주눅이 들어 그림을 보여주기조차 싫은 작가나, 모두 나인 셈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이야기에서 본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책을 통한 나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후에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내가 이 여행의 어디쯤에 있을지 궁금하다. 어디에 있든 보나 마나 물음표는 여전히 한가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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