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펜이 알려준 디테일의 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갓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변호사들은 무슨 사건이든 척척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가득하지만,
일을 시작하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친구들이나 친척 어르신들이 한껏 불어넣은 변호사 뽕은 입사하자마자 쏟아지는 배당사건들과 그로 인한 야근으로 인해 바람이 빠져버리고,
인생역작이라 생각하고 쓴 소송서류가 상급자 변호사님에 의해 원본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빨간펜으로 첨삭되면 그나마 어디서 공부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살아오며 쌓인 자존감마저도 바닥을 치게 된다.
체계가 잘 잡힌 로펌일수록 첨삭강도가 강한데,
법리구성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하였는지는 물론이고, 법률서면에 적합한 문장과 표현들을 사용했는지까지도 검토대상이 된다.
외국인이 어눌하게 우리말을 하면 어색하게 들리는 것처럼, 법률서면 작성방식에 관한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쓴 서면은 법률전문가가 읽었을 때 어색하고 내용이 잘 읽히지 않기 때문에 수준 높은 변호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제식 훈련은 필수다.
문단을 구성하는 방법, 문장을 배치하는 방법, 단어 하나하나를 상황에 맞게 골라 쓰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처음에는 원본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던 빨간펜 첨삭이 점차 줄어든다.
나는 '상당하다'와 '타당하다'를 적절히 골라 쓰게 되었을 무렵 처음으로 내가 쓴 서면에 단 하나의 첨삭도 받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 빨간펜 첨삭을 받았을 때는 '일도 바쁜데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모여서 큰 차이가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어떤 분야든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생활 연차가 쌓이고 긴장이 느슨해질 때마다, 나는 예전 빨간펜이 가득했던 서면을 받아볼 때의 초심을 돌이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