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의 추억 7. 보따리 할머니의 추억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결과만이 아니다

by 변호사 이동현


나는 법무관 때 항상 보따리에 소송기록 수천 페이지를 싸매고 법원 근처를 배회한다고 해서 ‘보따리 할머니’라고 불렸던 의뢰인의 사건을 맡은 적이 있다.



법원은 변호사 없이는 도저히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은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송구조를 허용해 주는데,


보따리 할머니는 그토록 법원을 배회하였음에도 어떤 변호사도 사건을 맡아주지 않아서 결국 소송구조를 통해 내 앞으로 오게 된 것이다.



예상대로 사건은 난해했고, 법적 쟁점은 끝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의 ‘변호사에 대한 불신’이었다.


내가 아무리 성심껏 도와드리려 해도,

“젊은 변호사가 뭘 안다고…” 불신 가득한 말씀에,

나도 사람인지라 의욕이 상실되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와 보따리 할머니가 겹쳐 보였고, 얼마나 억울하면 매번 저렇게 소송기록 뭉치를 보따리에 싸매고 다니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따리 할머니의 장황한 설명을 수능 듣기 평가처럼 들어가며 밤을 새워 사건을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 나는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보따리 할머니의 주장을 잘 정리해서 제출한 끝에 재판장님께 특급칭찬까지 들으며 사건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론 아쉽게도 보따리 할머니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패소하였지만, 보따리 할머니 또한 본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고 정리해서 판단을 받게 해 주었다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는지 마지막에는 후련한 표정으로 고생했는데 커피 한잔 하라며 내게 꼬깃하게 접은 몇천 원을 쥐어주고 떠나셨다.


법원 지박령 중 하나가 성불하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해 주고, 그것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뢰인의 억울함은 풀릴 수 있다.



소송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