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꿈을 포기할 기회

문학소녀가 국문과를 가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by 수연 Mar 21. 2025
아래로

어릴 때 내 꿈은 소설가였다. 소설이 좋았으니까. 소설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걸 좋아했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하고 싶었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도 하고, 아쉬운 결말을 다르게 상상해보기도 하고, 당혹감이나 불편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소설이 끝나도 소설이 계속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감상에 빠져 있기 좋아하던 어린 날에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이나 장래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무색할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업시간에 다른 친구의 등 뒤에 숨어 소설을 읽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절도 있었다.


당연히 대학을 가면 국문과를 선택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지 않았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면서도 또 너무 몰랐다. 진로를 정하고 공부를 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너무 많은 고민을 한 나머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열심히 하지도 못했다. 점점 생활과 글쓰기가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혼돈의 과정에서도 언젠가 소설가가 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 '언젠가'가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지만. 이미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누구도 나에게 소설 쓰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쓰기'는 항상 마음 한구석에 풀지 않은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소설은커녕 일기나 메모조차도 미루면서 십수 년을 보내면서도.


최근 방송대에서 영미문학 과목들을 재미있게 수강하다가 이번 학기국어국문학과 수업도 몇 개 신청했다. 물론 소설에 대한 과목이었다. 이번에도 국문과를 택하지 않은 나에게 최소한의 의무를 행하기 위함이었달까.


지난주에는 현대소설의 이해와 감상 출석수업에 다녀왔다. 1학년 수업인 데다 다른 학과 수업이라 나는 혼자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한강 작가와 함께 연세대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는 강사가 수업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창작에 관심이 많아서 국문과에 들어온 사람도 있으실 텐데, 저는 국문과에 들어온 후로 창작을 완전히 접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국문과의 장점은 빠르게 창작의 길을 포기할 수 있음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혼자 이마를 탁 쳤다. 


그렇구나! 이것이 내가 국문과를 택하지 않고, 혼자서 어떻게든 글을 써보겠다고 건방을 떨었던 대가구나. 내가 자연스레 국문과에 진학했다면 글을 쓰며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빨리 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었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에 속으로 쿡쿡 웃으며, 국문과 수업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들은 남았다.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과제를 집에 오자마자 후다닥 썼다. 잘 쓰인 소설 하나를 소화하고 나면 힘든 운동을 끝낸 것처럼 상쾌하다. 소설은 시간이 아깝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하지만 좋은 소설 한 두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 철학, 역사, 사회, 과학, 경제, 문화, 심리에 대한 책을 수십 권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믿는다.


뭐, 내가 쓰지는 못할 것 같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