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을 위한 한 줄

정아은,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중에서

by 나작

나 같은 사람, 혹시 있을까?


가장 보고 싶은 소설이나 영화를 가장 나중으로 미뤄놓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다 먹는 것처럼. 지금 말고, 좀 더 여유가 있을 때 봐야지. 지금은 좀 피곤하니까, 시간이 애매하니까, 기분이 안 좋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이 나왔으니 시간 될 때 읽어봐야겠다라든지, '네가 딱 좋아할 것 같아'라고 누군가 추천해 준 책을 언젠가 읽으려고 메모해 놓는다든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한번 봐야지... 같은 생각을 하다가 몇 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재미있을 것 같은, 그저 보고 싶은 것일 뿐인데, 자꾸만 미루는 심리는 왜일까.


마시멜로 실험으로 유명한 '만족지연'이라고 보기에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미루는 것이 아니니 해당되지 않는다.


꼭 읽어보고 싶던 책을 사놓고,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빌려오고, 밀리의 서재를 들락거리는 것도 비슷하다.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자꾸 뒤로 미뤄진다.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그러는 사이에 무의미한 시간들이 채워진다.


남는 시간에 주로 적당한 예능이나 숏폼 콘텐츠를 보면서 불안을 달랜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불안을 말이다. 어린 왕자의 술주정뱅이같이.


글쓰기는 좋아하면서도 평생에 걸쳐 미뤄온 무엇이다. 어릴 때는 무턱대로 유치한 글들이나마 써댔지만,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떠다니는 무언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고, 막상 써놓고 보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는 상황이 반복됐다. 다음 글을 한없이 미루기 시작했다. 제대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써야지, 다른 책도 더 읽어보고 나서 써야지, 쓰는 법을 배운 다음에 써야지.


불안은 잘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좋아하는 걸 더 잘 즐기고 싶고 좋아하는 일은 더 잘 해내고 싶다. 내가 좀 더 머리가 맑을 때 좋은 책을 읽고 싶다. 좀 더 느긋한 기분으로 영화를 보고 싶다.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정아은 작가의 책,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는 작가가 어떤 글을 쓰는지, 작가로서의 삶은 어떤지를 쓴 비문학 산문이다. 첫 장에서 글쓰기 수업의 수강생이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숙제를 미루다가 결국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그만두어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한때는 글쓰기 수업을 여러 개 들었더랬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가 가르쳐줘도 내가 지금 이 순간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불안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다음에.. 하고 미루는 대신, 조금이라도 해본다. 책을 펼쳐 한 장이라도 읽고, 블로그에 한 줄이라도 써본다.


내가 말한 도약이란,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 알고, 그것을 쓰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어떻게든 써내게 만드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도약'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도 도약의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그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말이 되든 안되든 이곳에 쏟아내고 있다. 오늘은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하나 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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