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기억

by 파란 해밀




시내 나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출구 쪽에 서 있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7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문 앞에서 한동안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만지지 시작했다. 계속 출입구 문틈 사이로 손을 갖다 댔다. 왜 그러시는지 잘 몰라서 한동안 지켜보았는데, 할아버지는 문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자꾸 문을 열려고 했다.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시면 돼요"
"........."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연신 문을 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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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얼른 내릴 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문이 열리고도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그렇게 문을 열려고 애를 쓰던 할아버지는 전혀 내릴 의사가 없는 사람처럼 망연하게 서 있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하철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이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젠가 외출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오려는데 갑자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수 십 년을 눌렀던 번호인데 갑자기 깜깜해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리 눌러보았지만 삐~~~ 소리만 쌀쌀한 대답처럼 되돌아왔다. 갑자기 닥친 참담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는 말로는 너무 싱거운 표현이다.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번호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 혼자 낑낑거리며 용을 썼다.

그러나 내가 누른 번호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등줄기에서 땀이 났다. 머리는 하얘지고, 심장은 마구 쿵쾅거렸다. 하는 수없이 가족에게 전화를 해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잠깐이나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찔하기만 하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나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이나 긴장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황하는 방법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몰라서 당황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하철 문은 속절없이 닫히고 덩그러니 남겨진 할아버지는 점점 내 눈에서 멀어졌다. 남겨진 할아버지는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머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내가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그 긴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잠시 깜빡했던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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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기억의 강탈!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지하철역에 혼자 서 있을 때 그래도 내가 놓고 싶지 않은 기억 하나는 무엇인지 내게 물어본다. 잊고 싶은 많은 기억에 묻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할아버지처럼 더듬더듬 내 기억을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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