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계획이 없어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숙소를 나설 준비를 했다. 느즈막 하다고 해도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해 되도록이면 오전에 다니는 게 낫다. 오후 열두 시가 넘어서면 햇빛이 살갗을 따갑게 찔러대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오는데 뒤에서 "Good morning?"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려니 했는데, 또다시 "Hello?"하고 더 한층 높은 목소리가 들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1층 테라스에 앉은 중년의 외국인 여성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다. 얼떨결에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도착한 첫날 저녁, 마당에서 놀던 토끼를 보며 한 마디 나눈 사람인 것 같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나는 그새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데 어찌 나를 기억하고는 일부러 먼저 인사를 건네는지 그녀가 무척 고마웠다. 숙소를 나서는 발걸음에 신바람이 걸린다.
어젯밤에 검색을 해 보니 근처에 왕궁이 있어서 걸어서 가 보기로 했다. 아직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했는데 근방이 우붓의 중심지였다.
왕궁을 가는 도중에 인근 상점들은 일찌감치 가게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발리에 오니 코로나가 많이 비껴난 것이 비로소 실감난다. 다른 도시에 비해 거리 곳곳에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왕궁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나마 들어가지 못하는 금지구역이 많아서 금방 돌아볼 수 있다.
입장은 무료인데 영문 설명이 없어서 뭐가 뭔지 모른 채 대충 눈치로 봐야 한다. 발리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명 관광지임에도 영문 자료가 없어 많이 아쉽다.
그런 것에 비하면 곳곳에 영문 설명을 잘 곁들인 한국이 격하게 생각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눈치껏 왕궁을 관람하고 나가는 길에 스타벅스가 보인다.
마침 커피도 마시고 다른 도시에서부터 눈여겨보았던 머그컵을 사려고 들어갔는데 머그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역대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것과 다양한 우표가 그려진 두 종류가 있는데, 색상과 패턴이 예뻐서 큰 마음먹고 하나 사려고 했지만 이동하는 동안 무거울 것 같아서 최종 목적지인 발리에서 사려고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 말에 의하면 이미 다 팔렸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다 쓸어 갔다는 것이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벅에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은 나는 패턴이 독특하고 마음에 들어서 하나 살까 했는데, 안 사도 그만이지만 이렇게까지 싹쓸이를 할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가히 스벅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기를 절감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노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정답게 노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로 한동안 지켜보았다.
노부부가 함께 늙어 가는 것이 이젠 아름답게 보이는 나이가 된 것일까? 새파란 청춘에 만나 서로의 주름을 나누고, 백발이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덤덤하게 늙어가는 뒷모습에는 젊음이 흉내 내지 못하는 빛깔이 있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커다란 정문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뭐 하는 곳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옆에 있는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박물관이라고 한다.
입장료 145,000루피아를 내고 들어갔다. 다른 곳에 비해 약간 비싼 듯했는데 마지막 코스에 있는 카페에서 티켓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주로 1900년대 초중반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개의 분리된 건물에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커다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일반적인 전시관과는 달리 다소 목가적인 분위기이다.
몇 개의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끝에 전망 좋은 자리에 카페가 있다. 점심을 준다고는 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마침 점심 때도 지나서 가볍게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볶은 누들을 시켰다.
닭꼬치와 새우, 계란이 곁들여 나온 누들은 예상외로 맛이 있었다. 그동안 먹었던 현지 음식에 비해 덜 짜서 반 이상을 정신없이 먹었다.
지나다가 우연히 들른 동네 잔치집에서 거한 점심대접을 받은 것 같다. 정말 돈을 안 내도 되느냐고 물으니 티켓 값에 포함되어서 안 내도 된다고 하는데 괜히 공짜로 얻어먹은 것 같다.
결국엔 조삼모사인데 모처럼 맛있게 먹은 점심 때문에 사리분별이 잘 안 된다. 어쩌다 입에 맞는 밥 한 끼가 사람의 정신줄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그동안 음식이 짜서 번번이 고스란히 남겨두고 돈만 내고 나와야 했는데, 어쩌다 얻어걸린 볶음면 한 접시가 오후의 뜨거운 뙤약볕도 씩씩하게 쏘다닐 수 있게 한다.
맛있는 밥 한 끼가 사람을 참 원시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밥 한 번 먹자" 라는 말을 빈 인사말로 내뱉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