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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며 그리며 인도네시아
18화
돌고 돌아도......
by
파란 해밀
May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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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짬뿌한 릿지 워크라는 트래킹 코스가 있는 것을 알았다. 페낭에 갔을 때 조용한 국립공원에서 트래킹을 즐겼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도 가보기로 했다.
다만, 페낭에서는 가는 내내 숲 길이라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는데 반해, 이곳은 그늘이 없어 너무 더운 시간에는 피하는 게
좋을 듯해서 아침을 먹자마자 8시 반쯤 튀어 나갔다.
숙소에서 짬뿌한 릿지 워크 입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걷기로 했으니 오토바이를 부르지 않고 입구까지도 걸어가기로 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구글 경로가 잠시 흔들리더니 우회전을 하라고 한다. 처음에 알려준 방향과 달랐지만 해외에 나오면 무조건 구글이 형님이다.
시키는 대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니 소요시간이 1분이 늘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오차 범위로 인정하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걸었다.
가다가 그림 그리기 좋은 소재가 나오면 사진도 찍고, 예쁜 카페가 나오면 나중에 돌아올 때 들러야지 하며 찜콩도 해두었다.
그런데 가는 길이 너무 꼬불꼬불하고 심지어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어쩌다 오토바이와 차들은 오갔지만 제법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는데 이렇게 가는 사람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서 보면 직선으로 가로질러 가면 가까울 텐데 왜 이렇게 둘러둘러 가는지 가면서도 의아해했다.
어쨌든 이 길로 접어들었으니 시키는 대로 계속 걸어갔다. 10분 남았다는 길은 아무리 가도 계속 10분을 가리키더니 7분쯤 남겨 놓고 커다란 길이 나오면서 우회전을 하라고 한다.
이제야 곧고 넓은 길이 나오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동안은
지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신경 쓰였는데 큰 길로 접어드니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5분을 남겨 놓고 우회전을 하자 왠지 길이 낯이 익다. '어! 여기 와 본 길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제 본 상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어제 숙소에서 나와 일직선으로 걸었던 그 길이었다. 왕궁, 스타벅스, 점심을 잘 먹었던 아트 박물관이 있던 그 길의 연장이었다.
어쩐지 지도상에서도 곧장 가면 가까울 길을 이렇게 큰 ㄷ자를 그리며 갈 필요가 있나? 했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잠시 멈칫하면서 몸을 튼 사이 구글은 잽싸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것 같다. 이렇게
발 빠른 구글의 한국 토착형(?) 대응이 나로 하여금 한참을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눈에 익은 길로 접어들면서 겸연쩍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걷자고 나온 날이니 조금 더 걷는다고 억울할 일은 아니지만 멍청한 짓을 한 것 같아서 누구한테 들킨 것처럼 쑥스럽다.
동행이 있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테지만 혼자라서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던 길을 갔다. 그래도 호젓한 동네의 사진을 건졌으니 아주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빠져나온 대로에서 얼마 안 가 짬뿌한 릿지 워크 입구가 나왔다. 숙소에서 나오면 보일 것처럼 빤한 길에 있는 이곳을 빙빙 둘러온 내게 또다시 콧방귀를 출발 시동처럼 뀌고 걷기 시작했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고, 가파르지 않아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지만 그늘이 없이 빛이 따갑다.
콧잔등에 땀이 맺히려고 할 즈음, 앞서가는 아가씨 두 명이 계단에서 사진을 찍느라 잠시 멈추었다. 인도 뭄바이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 사이인데 나한테도 저런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엄청 활기차다.
어느새 우리는 말동무가 되어 같이 걷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한국 드라마를 엄청 재밌게 잘 보고 있다며, 나도 모르는 드라마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다
그녀는 사랑의 불시착과 갯마을 차차차에 열광을 했다. 실제로 커플이 된 주인공들의 뒷 이야기까지 나보다 더 세세하게 잘 알고 있었다.
인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며 언젠가 꼭 한 번 오라며 중간 지점에서 그녀들과 헤어졌다. 숙소에 남아 있는 다른 일행이 예약한 투어 준비가 다 되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들과 헤어지고 나서도 그들의 통통 튀는 기운이 오래도록 느껴졌다. 드라마 얘기만으로도 그렇게 신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젊으니까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젊음. 그 자체만으로 기꺼이 아름답지 않은가? 양쪽에서 두 사람이 정신없이 왕왕거리다가
돌아기니 갑자기 다시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길을 따라 한참을 더 가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조금 더 마을을 따라 걷다가 되돌아 나왔다. 오는 길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러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켰다.
앉아 있는 테이블 바로 앞까지 바나나 잎이 무성하다. 접시로 쓸 요량인지 주인아저씨가 낫을 들고 와서 바나나 잎사귀 몇 장을 뜯더니 즉석에서 다듬어서 가지고 간다.
단순한 그들의 생활 방식이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로 내 집 창가에서 너울거리는 나뭇잎으로도 밥상을 차릴 수 있는데,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땀을 식히고 카페를 나와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직진으로 곧게 뻗은 길로 오니 느린 내 걸음으로도 20여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 빙 둘러 가긴 했지만 뜻밖의 길을 구경할 수 있었고, 가보지 않은 길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도 만났다.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어느 길을 가느냐 보다 어쩌면 내가 가는 이 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의미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하루였다.
에둘러
돌아서 가도 되는 것을...... 이제는 삶의 고삐를 조금 느슨히 쥐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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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며 그리며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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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해밀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50대 중년과 마주했다. 어이없어 한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여행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조금씩 그 동굴을 혼자 걸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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