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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 또 다른 선택

by 파란 해밀




우붓에서 이틀을 남겨두고 많이 가는 투어를 하나 더 다녀올지, 무작정 우붓 길을 따라 걸을지 한동안 고민을 했다. 코코넛 오일 클래스를 위해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가다가 힘들면 가끔씩 데이터도 끊어지는데 고젝을 어떻게 부르지..... 이정표도 없고, 있다 해도 까막눈에게는 무용지물이라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아는 길과 가 본 길을 가는 것은 이럴 때 얼마나 마음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모르는 길, 더욱이 혼자 가는 길이라 이런저런 걱정이 많이 앞섰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이름난 트래킹 코스도 아니라서 순전히 나의 배짱(?)만 믿고 가야 한다.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언제 내가 발리에 와서 이름난 관광지를 구경하겠어? 도 가치 있는 선택이지만, 나는 다소 걱정스럽긴 하지만 언제 내가 이 길을 걸어볼 수 있겠어? 를 선택하기로 했다.


조금 덜 더운 시간에 걷기 위해 아침을 먹자마자 숙소를 나섰다. 아침나절에는 아직 선선한 바람이 있어서 걷기에 딱 좋다.






큰 도로를 벗어나니 작고 호젓한 길로 접어든다. 도로에 부딪힐 듯 쓸려 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내려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따금 현지인들 한두 명만 지나칠 뿐이다.


부지런한 농부가 곱게 손을 봐 놓은 논에는 파란 하늘이 내려와 세수를 하느라 물에서 찰방거린다. 바람도 덩달아 불어와서 물장구를 친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가면서 처음에 들었던 불안은 조금씩 사라졌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가다 보니 왔던 길을 씩씩하게 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길을 잃을까 걱정했던 곳도 결국엔 다 사람 사는 곳이라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몸짓으로 말하면 된다.






걱정하고 망설였던 것에 비해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하면 될걸..... 지레 많은 걱정을 했다.


결정 뒤에 따라붙는 잡다한 생각들을 털어버리면 의외로 선택은 간단하고 상황은 명백해지는데 그렇게 하기까지가 쉽지 않다.






한쪽을 포기하고 나니 다른 한쪽이 선명해지고 그쪽에 집중할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안전과 길, 양쪽을 다 취할 수 없다면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흔히 포기는 잃어버리는 것,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포기도 의미 있는 선택만큼이나 가치 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포기하는 순간 그동안 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서 억울한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 순간 내 앞에 열리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단지 그 기회는 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놓치는 것만 크게 느껴지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동안의 과정은 사라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 일부분으로 스며들었거나, 아픔이나 추억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아프다고 내 것이 아닌 냥 되지 않고, 상처라고 남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포기가 마치 실패인 것 같은 앞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니 포기도 또 다른 선택이자 기회였다.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포기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내겐 그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선택이었다.


낯선 길을 걸어보고 나니 그 생각이 좀 더 분명 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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