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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Nov 08. 2023

다음은 아무도 몰라




몇 년 전에 행잉 식물 하나를 샀다. 빛이 잘 드는 거실 창에 걸어 두었는데 볼 때마다 그곳에서 눈이 잠시 편하게 쉬어간다.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 물에 푹 담가주는 게 전부인데 한결 같이 초록을 품고 있는 것이 고맙고 기특하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때문에 흙이 담긴 화분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했다. 뛰어다니다가 화분을 발로 차서 깨거나, 흙을 온통 파헤쳐서 거실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대체로 행잉 식물을 선택했는데 다행히 그건 녀석이 건들지 않아서 그나마 유일하게 집안에서 구경할 수 있는 초록이다. 







행잉 식물이 생각보다 잘 자라서 용기를 내어 올봄에 조금 작은 것으로 두 개를 더 샀다. 한 개는 거실에, 다른 한 개는 욕실에 걸어두었다. 그 작은 초록이 뭐라고 걸린 자리가 한결 싱그러워 보였다. 때마다 고양이 밥을 챙겨주듯 때 맞추어 꼬박꼬박 물을 주었다. 욕실과 거실에 번갈아 걸어 빛을 골고루 쬐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서로 경쟁하듯 초록을 뿜어내더니 하나가 시들기 시작했다. 손만 스쳐도 잎사귀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잎사귀의 2/3가 떨어져 나간 화분은 괜히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잎사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선뜻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로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냥 말려 죽일 수는 없어서 다른 식물들을 물에 담가 놓을 때 곁다리로 자리를 내어 물을 먹게 했다. 살면 살고, 말려면 말라는 거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 잎사귀가 조금 싱싱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러다 말겠지...... 하고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여전히 물만 함께 주었다. 

잘 자라던 나머지 하나도 한동안 잘 크나 싶더니 갑자기 잎사귀가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건들면 툭툭 떨어지더니 급기야 휑한 머리처럼 초록이 숭덩 덜어져 나갔다. 논의 벼도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내가 썼던 마음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서 괜히 서운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때가 되면 물을 주고 빛을 쬐어주었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던 건 싱싱해지고, 마음을 다했던 건 오히려 시들시들했다. 버리려던 내 생각을 읽었을까? 악착 같이 버티느라 파랗게 용을 썼는지 잎사귀가 짙은 비리디안을 띤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했지만 작은 잎사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섣부른 나의 속단이 더 푸르게 살 수 있는 생명을 쉽게 내치려고 했던 것 같아 미안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너는 이제 끝났어'라고 일찌감치 마침표를 찍은 것이 자꾸 걸렸다.







겨우 손바닥만 한 작은 식물도 살기 위해 저토록 애를 쓰고, 그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는데 지레 나를 포기하고, 접었던 일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잎사귀처럼 되살아났다. 연한 엘로우 그린이 청색을 품은 비리디안이 되기까지 녀석은 얼마나 안간힘을 다해 견디었을까?

제 스스로 다 해서 잎사귀를 떨구기까지 미리 단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도 내 안의 초록이 파랗게 될 때까지 저들 같은 사력을 다해 보지 못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지레 선을 그었는지 부끄러워진다. 








작은 잎새에도 다 뿜어내지 않은 초록이 있고, 더 뿜어낼 초록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내게도 어쩌면 아직 그런 초록이 있을지 모른다. 지레 했던 속단과 특별히 한쪽으로 기울었던 편협을 거두고, 이제는 때가 되면 덤덤하게 화분에 물을 준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옆에서 슬쩍 나도 파란 물을 적신다. 


지금은 기다, 아니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작은 잎새처럼 남은 초록을 토해내는 것이다. 왜냐면 다음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다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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