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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Sep 14. 2024

다시 번져간다......





지난밤에 미리 싸두었던 가방을 챙겨서 아침부터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금요일 이사를 하고 월요일부터 그림을 그리러 나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어떻게라도 빨리 움직이고 행동해야 할 것 같아서 이사 오기 전부터 문화센터 두 곳에 등록을 해두었다. 길도 익히고 풍경도 감상할 겸 버스를 탔다. 낯선 해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처럼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싹 차리고 앉았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지날 때마다 버스는 조용하고 전원적인 풍경에서 벗어나 점점 도심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려 백화점이 있는 곳에 내리자 눈에 익은 번쩍이는 높은 빌딩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갑다. 전혀 생각지 못한 내 안의 반응이었다.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와 정취가 밀려왔다.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좀 살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도시적인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익숙한 곳을 떠나온 미련때문 일 것이다. 이사 준비 때문에 한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붓을 오랜만에 들었다. 잘 그릴 수 있을까? 했던 우려와 달리 몸은 여전히 붓놀림을 선명하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 시간 반의 수업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흘렀다. 화풍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교실도 다르지만 좋아하는 어반 스케치를 할 수 있어서 숨통이 트였다. 한 시간 동안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지만 피곤함보다는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다음 날도 커다란 화판을 챙겨 다른 수채화 수업을 받으러 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하던 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라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관계를 빨리 결집시켜주는 것 같았다. 첫날이라 회원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었다. 노곤함이 진드기처럼 붙어있던 그리움을 잠시 떼어냈다. 

밤을 새우고, 오른쪽 어깨를 갖다 바치며까지 그렸던 그림이 어느새 내 삶의 깊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과 섞여 소리 없이 번지는 물감이 속절없이 일렁이는 내 마음에 색을 입힌다. 투명한 밑 색과 겹치면서도 잘 어우러지게 숨을 죽이고 물이랑처럼 멀리멀리 퍼져간다. 나도 따라 한 번 번져가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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