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첫날!

시그나기로 가는 길......

by 파란 해밀


2019년 9월 27일부터 17일 일정으로 조지아를 갔다. 2018년 같은 시기에 조지아 여행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중에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바람에 예약해 둔 모든 티켓과 일정을 취소하고 꼬박 1년을 기다렸다.


장기 하나를 몸에서 떼어내는 아쉬움보다 조지아를 미루어야 했던 아쉬움이 더 크게 남았던 해이다. 그렇게 1년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조지아를 향해 배낭을 꾸려 혼자 길을 나섰다.





밤늦게 트빌리시 숙소에 도착해서도 잠을 설치고 이튿날 아침 일찍 시그나기로 출발했다. 숙소가 디두베역 앞이라 당연히 시그나기로 가는 차가 있는 줄 알았는데 ISANI 역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서 그냥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타고 보니 Bolt 보다 50라리는 더 부른 것 같았지만 비에 젖은 운전기사의 야윈 등이 그냥 모른 척하라고 한다. 누군가 함께 여행을 왔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일이지만 혼자 다니다 보면 때에 따라 즉흥적으로 할 수 있어 이럴 때는 속이 편하다.





ISANI역에 도착한 운전수는 차가 고장이라며 나를 다른 차에 토스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아저씨가 익히 듣던 대로 사기의 시동을 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매뉴얼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시그나기로 가는 밴에 나를 팔아먹고(?) 요금의 일부만 챙기고 다시 디두베로 가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자기 차가 고장 났으니 다른 차로 옮겨 타라고 하며 50라리는 먼저 달라고 한다. 어차피 줄 150라리이니 돈을 건네주고 다른 차로 갈아탔다. 그 차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100라리를 달라고 한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왜 돈을 먼저 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계속 돈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슬로베니아에서 온 남자 여행객 두 명이 그 차를 탔다. 나 혼자 타는 차가 아니라 시그나기로 가는 마슈로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그들에게 차비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20 라리라고 한다. 애석하게도 내가 돈을 내기 전에 그들이 타는 바람에 운전기사는 더 이상 100라리를 요구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다른 승객들이 타기 전에 돈을 받아낼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 중에 애초에 탔던 택시기사가 다시 와서는 자기 차로 다시 옮겨 타라고 한다. 그들의 작당(?)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예정대로 첫 운전자의 차를 타고 혼자 시그나기로 갔다. 고장이라던 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 잘만 달렸다.


빤히 보이는 그의 사기(?)에 암말 않고 앉아 있었더니 가는 동안 어떠냐고 나의 기분을 살피면서 가는 길에 차를 세우고는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서 건네준다. 사실은 그의 사기행각에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가는 길에 보이는 조지아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있느라 암말 않은 것이었는데, 어설프지만 숨기지 못하는 그의 속내가 그대로 읽어졌다.





베트남에서 천 원이면 가는 거리를 만원이나 갈취(?)해간 택시기사한테 당한 게 분해서 한동안 씩씩거리고 동동거렸던 그 성질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젠 사기에도 조금씩 의연해지는 것 같다. 기사의 선하고 커다란 눈망울에 그냥 내가 모른 척 한 건 지, 아니면 한국에 잠시 두고 온 나와 똑같은 생활의 땀냄새를 그에게서 느껴서인 지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굳이 악악거리고 싶지 않았다.





시그나기에 도착한 그는 그의 의도가 미안했는지 숙소 전화번호를 묻는다. 메인 광장까지만 데려다주면 찾아갈 수 있는데 굳이 숙소 주인과 통화를 한다. 숙소는 가까운 위치에 있고 비가 오니가 주인이 픽업하러 오는 동안 차 안에서 기다리라며 과한(?) 친절을 베푼다.


이내 숙소 주인이 도착하자 그는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시그나기는 운전수의 깜찍한 사기(?) 행각을 금방 잊게 만들었다. 영어가 능통한 숙소 호스트의 친절함에 녹았고, 타박타박 걷는 느린 걸음에 나도 모르게 스며든 작은 마을의 온기에 녹았다.





아무 생각 없이, 어디가 어딘지 몰라도 걷다 보면 결국엔 다시 그 자리로 오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한 귀퉁이에 있는 투어카를 타고 약간 외곽으로 벗어나 돌아보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박자박 걸어서 돌아보기에 충분한 소박한 동네이다.





손을 뻗어 마른빨래처럼 홱 걷어채어 가서 집에 걸어 두고 싶은 그림 같은 풍경이다. 신랑이 늦게까지 술을 퍼마시고 오거나, 고양이 녀석이 온 집에 두부 모래를 흩뿌려 놓아도,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미친 여자처럼 혼자 실실거릴 것 같다.


미루어 둔 일이 좀 남았으면 어떠랴?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이 좀 있으면 또 어떠랴? 슬며시 치받는 크고 작은 분노도 이 정취 앞에서 어찌 맥없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리악사의 걸쭉한 목소리에 한동안 넋을 잃고 그의 노래를 들었다. 쌀쌀한 바람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가 돈가방을 챙길 때까지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묵직한 그의 중저음이 바람을 타고 시그나기 거리 곳곳을 돌다가 내려앉는다.





바늘 끝 같은 마음에 꼭꼭 꽁쳐두었던 시름 하나 풀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저 너머로 날려 본다. 빗장 같은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이 풍경 앞에 속절없이 열리고 만다.





'사는 게 뭐 별 거냐?'

막상 떠나와 보니 등에 진 배낭 하나도 무거운데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거머쥐려고 바둥거린 것은 아닌지....... 지금 가진 것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더 안달하며 살아온 것 같다.





싸구려 알뜰폰으로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눌러도 시그나기는 금방 세수한 듯한 뽀얀 맨 얼굴을 고스란히 내어준다.


나도 이제 내 삶의 민낯으로 소박한 배낭 하나 꾸려 나서볼까 싶다. 육십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용기를 가장한 객기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자꾸 치받는 것 같다. 이제 나도 조금씩 늙을 준비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시그나기 어느 골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