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눈부시게 내리고......
2019.09.30. 조지아 쿠타이시
트빌리시에서 쿠타이시로 넘어왔다. 도착한 버스 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택시를 불러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넓은 도로와 양 옆으로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또 다른 도시는 어떤 모습일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훑으며 지나갔다.
대충 짐을 정리해 놓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한낮의 구타이시는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이래도 되나?'
'햇살이 이렇게까지 눈부셔도 되나?'
숙소에서 나와 박물관을 가는 길에는 양 옆으로는 가로수가 길게 늘어서 있다. 그 위로 크리스탈 같은 햇살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다. 태어나 이런 햇살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나는 빛나는 햇살과 푸른 하늘에 정신을 온통 빼앗겼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쿠타이시 골목은 작정하고 나를 홀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 유혹에 대놓고 넘어간다. 그렇게 나는 쿠타이시의 가을에 미쳐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이 즈음 박물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잘 몰라서 나무 그늘 밑에 쉬고 있는 조지아 아저씨에게 방향을 물었다. 그들은 무료했던 걸까? 세 사람이 합작으로 열심히 길을 알려준다. 만약 내가 더 헤맸으면 아마 업어서라도 데려다 줄 듯 다들 자기 일처럼 나선다.
알려준 대로 도착한 박물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전시품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니 해설사가 정성껏 설명을 해준다. 조지아 사람들의 친절이 가을 햇살만큼이나 풍성하다.
박물관을 나와 바그라티 성당으로 향했다. 태양은 바그라티 대성당을 오르는 길에 있는 담벼락이 허름하고 낡았다고 가려서 내리지 않는다. 깨지고 오래된 돌 틈바구니에도 구석구석 가을과 함께 내려와 있다.
구불구불한 동네 어귀를 오르다 보면 어느새 바그라티 성당 입구에 다다른다. 오르는 길은 영락없이 시골마을 뒷동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야트막하고 구불구불해서 힘들이지 않고 구경하며 오르는 재미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바라보이는 성당의 민트색 지붕이 시선을 끈다. 민트색 지붕이 도도하리만큼 상큼하다. 갑자기 민트색 셔츠 하나 사고 싶어 진다.
낡고 선명하고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조지아에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민트색을 많이 본 것 같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색상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그냥 궁금한 채로 남아 있다.
저 나무가 없었다면 허전했을 성당, 둘이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린다. 성당을 잘 받쳐주는 유능한 조연으로 푸르게 푸르게 우뚝 서 있다. 언덕 위에 성당이 있어서 아래로, 사방으로 쿠타이시를 볼 수 있는 좋은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바그라티 성당을 내려오는 길에 철문을 칠하는 페인트공을 만났다. 갑자기 벅벅 페인트 칠이 하고 싶어진다. 한 번 칠해봐도 되겠냐고 손짓, 몸짓으로 이야기했더니 그러라며 선뜻 붓을 내어준다.
단 번에 문짝 네 개를 칠했다. 오랜만에 붓을 쥐어보니 아무래도 이게 딱 내 직업이구나 싶다. 암만 봐도 내가 그보다 더 잘 칠한 것 같다.
'아! 나도 페인트칠이나 하면서 여기 그냥 눌러앉을까?'
10년 넘게 유화를 그리느라 열심히 캔버스 밑 칠을 한 것이 조지아에 와서 남의 집 담벼락을 칠하면서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옆에 있던 페인트공이 엄지척을 마구 날려 준다.
돈벌이로는 그다지 넉넉한 직업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얼굴에 생활의 찌든 흉은 없어 보인다. 거의 예수님 상이다. 페인트 칠을 하다가 내 손등에 페인트가 튀자 부리나케 달려가 어디선가 페인트 지우는 용액을 가져와서는 자기 소매 끝에 묻혀 열심히 얼룩을 닦아준다. 마음도 예수님이다.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어느 낡은 집 담벼락이 내 발목을 잡는다. 낡고 깨어져 보잘것없지만 주인은 그 앞에 조롱조롱 애호박 같은 작은 화분을 갖가지 용기에 담아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집주인의 성격도 화분과 같이 조롱조롱 놓여 있다.
싸구려폰으로 아무렇게 꾹꾹 눌러도 쿠타이시의 가을은 작품이다.
햇살도, 나무도, 하늘도, 바람도.
그리고
전깃줄마저도......
조지아의 남은 날을 세어 본다. 보낸 시간보다 황홀한 조지아에 머물 수 있는 날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아껴 먹던 사탕이 주머니에 몇 알 더 남은 것을 안 아이처럼 내 발뒤꿈치에 자꾸 신바람이 걸린다.
하루 종일 이 빛을 맞고 한껏 싸돌아다녀도 좋겠다. 나는 빛에 취했는데 술 취한 사람처럼 자꾸 실실거린다. 얼마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며, 얼마 만에 보는 티 없이 깨끗한 햇살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쏟아지는 햇살만 받고 있어도 쿠타이시에 온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조지아의 찬란한 가을은 나뭇잎을 빌려 쿠타이시를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