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의 3월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린다. 택시기사도 왜 제일 더운 이때 여행을 왔느냐고 나를 안타까워해 준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려고 창 밖을 내다보면 이글거리는 햇빛에 차마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기에 와서 빗속에 질척거리며 다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억지로 위로를 해본다. 그렇게라도 해야 길을 나설 수 있다.
페낭에는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를 해 살고 있어서인지 거리가 중국 분위기가 많이 난다. 페낭의 올드타운은 낡고 허름하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골목골목마다 소소한 볼거리가 많아 삶을 듯한 뜨거운 땡볕에 빨갛게 얼굴이 익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게 된다. 장시간 다닐 수가 없어 간간히 카페에 들러 열기를 조금 식히고 나와야 한다.
그렇게 다니다가 바틱 박물관 앞에 멈추었다. 바투페링기에 머물고 있을 때 바틱으로 만든 의류를 본 것이 전부인데 그것으로 이런 작품도 만들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바틱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문 앞으로 보이는 액자 몇 개 만으로도 사람을 혹하게 만든다.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장인 듯한 연세가 있어 보이는 남자분이 맞아주셨다. 2층에도 작품이 있으니까 천천히 구경하라고 한다.
한 점, 두 점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엇으로 그린 건지 궁금했다. 재료가 무엇이든, 어떻게 그렸든 작품 하나, 하나는 모두 한결같이 매력 있는 색채와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액자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코 앞까지 가서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나의 몸짓이 안쓰러웠는지 박물관장이 와서 사용하는 도구와 함께 바틱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다.
단단하고 가느다란 철필 같은 것으로 일일이 물감을 찍어서 그리는데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는 붓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매우 정교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한 작품 업어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오묘한 색상이 탐나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도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본격적으로 배울 수야 없겠지만 간단하나마 체험이라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박물관장에게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곳에서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서 못하고, 가르치는 분이 있지만 여기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퇴직 후에 작심하고 다시 와서 한 번 배워볼까? 내가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수 십 번도 더 아쉬워하며 박물관을 나왔다.
이래서 여행이 때로는 사람의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갑자기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멋진 여행지는 많았지만 눌러앉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는데 바틱은 페낭에 대한 이유가된다.
좀 더 젊어서 내게 남은 시간이 많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도전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코 앞에 닥친 현실에 급급하며 정신없이 지내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60이 코 앞이다. 젊었을 때는 인생이 참 긴 것 같더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이 참 짧고 덧없기만 하다.
얼마 남지 않은 퇴직을 앞두고 37년간 해보지 못한 완벽한 백수를 기다리며 해외 어학 연수를 꿈꾸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일렁임에도 꿋꿋이 버텨온 내게, 내가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이또한 여행으로 인한 계획이다.
페낭의 바틱처럼 때때로 여행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갑자기 튀어나온 이정표가 되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