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을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이 벽화 하나 때문이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벽화를 보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말레이시아 페낭행 티켓을 끊었다.
주변의 다른 구조물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빛바랜 벽화들은 내가 페낭을 찾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페낭의 3월은 끔찍한 더위가 연일 이어졌다. 낮에 조금만 돌아다녀도 얼굴은 방금 삶아낸 고구마처럼 뜨겁게달아오르고, 옷은 어느새 땀에 젖는다. 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 내 입에서도 "헉" 소리가 날 만큼 덥고 습하다.
아무리 모자를 쓰고 양산으로 가려도 뜨겁게 내려쬐는 뙤약볕에는 참으로 속수무책이다.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반팔 셔츠를 입고 다닐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지나는 길에 가게에 들러 한국이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무덤덤한 면 셔츠와 바틱으로 만든 바지를 사 입었다.
입으면 벙벙해서 절대로 뽀대가 안 날뿐 아니라 순식간에 촌년으로 만들어준다. 그래도 신기하게 긴 팔, 긴 바지인데도 반소매를 입었을 때보다 오히려 시원해서 페낭에서 입고 다니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따가운 햇빛을 많이 가려주어 주구장창 입고 다녔다.
그동안 벽화라면 단순히 그림만 떠올렸던 내게 페낭의 벽화들은 참으로 신선했다. 내가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를 너머 자유자재로 표현한 것에 경외감마저 든다.
그림과 잘 어울리는 구조물을 적절히 설치하여 조화를 이루면서 그림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그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낡았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오래되었다고 구석 떼기에 밀쳐두지 않았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벽화를 하나, 하나 찾아서 만날 때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래, 맞아 저런 때가 있었지' '나도 저랬었지'
하며 고개 끄덕여지는 그림들은 친정엄마가 해주시던 옛날 이야기처럼 하나 같이 다 재미있다.
구석진 골목길, 후미진 외딴곳, 여기저기에 그림은 흩어져 있다. 지도를 보며 마치 보물찾기 하듯 두 시간가량을 찾아다녔다. 제대로 찾아왔다 싶어서 둘러보면 벽화는 잘 보이지 않고, 주변에서 뱅뱅 돌기도 한다. 날씨는 덥고, 다리는 아픈데 벽화는 생각만큼 쉽게 잘 찾아지지 않는다.
겨우 그림 몇 개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뜨거운 땡볕에 온몸이 녹을정도로진이 다 빠질 즈음, 근처에 서 있는 인력거(?)가 눈에 띄었다. 벽화를 찾는다고 했더니 익히 다 알고 있는 기사는 하나, 둘 샅샅이 훑듯 데려다주고 사진까지 찍어준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계속 혼자 찾아 나섰다면 하루 온종일 다녀도 다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범위가 결코 만만치가 않아 인력거를 이용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아마 제대로 다 찾지도 못하고 더위만 잔뜩 먹고 페낭 올드타운에서 장렬히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림들은 하나 같이 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위압적이거나 지나치게 화려해서 쓸데없이 사람을 압도하지 않을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들과 금방 동화가 된다. 집에 두고 온 우리 집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고,
오래 전 우리가 했던 일상이자 여전히 기억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도 벽화 속 그들의 일부가 된다. 그림과 더불어 나도 한 편의 이야기로 함께 만들어진다.
'나도 저랬는데.......' 나도 저렇게 오빠가 태워준 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해 지는 바닷가를 달려가곤 했었는데......
어릴 적 아스라한 추억도 소환하고, 잊고 있던 기억도 바로 코 앞에 갖다 놓는다. 꼬마를 따라 까치발도 해보고,
작은 종아리에 잔뜩 담긴 녀석의 뜨거운 야망(?)에 피식 웃음도 나온다.
새롭게 그려진 그림도 더러 있다. 오래된 벽화에 비해 색상이 확연히 선명하다.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 나이가 들어가겠지......
벽화를 찾아 정신이 팔려 몇 시간을 돌아다닌 덕에 숙소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다 되었지만, 오래된 낡은 벽화가 있는 페낭의 올드타운은 뙤약볕에 삶기면서도 다닐만큼 충분히 매력 있는 동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