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편에는 바다로 나갈 있는 작은 출입문이 있어서 언제든지 쉽게 드나들 수 있다. 바투페링기에 도착한 첫날부터 놀이터처럼 수시로 들락거렸다.
바닷가에는 패러세일링을 비롯한 각종 액티비티도 할 수 있고, 식당이나 카페, 그리고 해 질 녘에는 조용한 바다의 정취를 즐길 수도 있다.
뒷문을 나서면 바로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가 있다. 그 아래에 나무 평상을 놓고 거기서 마사지를 하고 있다.
사방이 다 트인 곳에 엎드려 마사지를 받는 게 어색할 법도 한데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몇 번을 들락날락하다가 비행기 지연으로 인한 피로가 쉽게 가시지 않아 발마사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받아보기로 했다.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내 담당은 여자 맛사지사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니 오히려 바닷가라서 시원한 바람도 불고 운치가 있어 더 좋다.
그녀는 연신 "오케이? 오케이?"를 연발하며 내 상태를 물었다. 워낙 힘이 좋아 "악"소리가 날만큼 아플 때가 더러 있었지만 적당히 힘 조절을 하고 나서는 나도 "오케이"로 대답해 주었다.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 얼굴을 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잔뜩 바른 선크림이 밀려 군데군데 하얀 크림이 얼룩덜룩 묻어 있다.
제대로 된 피부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투박한 더께가 뒤덮여 한눈에 봐도 그녀의 얼굴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안쓰러웠지만 대놓고 쳐다볼 수가 없어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살짝 보았다.
몇 년 전, 나 역시 피부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다. 피부과에서는 면역력이 떨어져서라고 하지만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손 만 대어도 만진 자리에 또르륵 진물이 흐르고, 툭하면 얼굴은 성을 내어 붉은 반점이 툭툭 불거지곤 했다. 병원에서 주는 연고를 발랐지만 조금 낫다가 이내 또 성을 내고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살살 달래가면서 데리고 살라고 하지만 그 속을 내가 모르니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고 막막하기만 했다. 계속해서 약을 바꿔가며 먹고, 바르고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고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수영을 하고 나서부터 얼굴이 좋아졌다.
그 연관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영을 시작하면서 차츰 불거지는 정도나 횟수가 줄어들더니 그 후로는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녀의 심상치 않은 얼굴의 상태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얼굴은 왜 그런 거예요?"
하고 살며시 물어보았다. 오래전부터 생긴 햇빛 알레르기인데 가려워서 긁다 보니 얼굴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해보았지만 약을 바르는 동안은 조금 차도가 있고, 그러지 않으면 다시 재발하곤 해서 지금은 거의 손을 놓은 상태라고 한다. 매번 병원을 다니기에는 그 비용이 턱없이 비싸고, 그럴 돈이 없어 매일 선크림을 바르고 스카프나 두르는 정도라고 한다.
피부질환을 앓을 때 의사는 내게 선크림조차 바르지 못하게 했다. 그 또한 화학제품이기 때문에 얼굴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선크림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온 얼굴에 백탁이 밀리도록 바르고 있었다.
나도 예전에 피부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서 그 고통이 어떤지 잘 안다고 했다. 공통분모가 있어서 우리는 갑자기 가까워진 사이가 되어 소소한 주변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녀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영업용 영어회화가 가능했다.
그녀의 고향은 코타키나발루인데 남편과 함께 이곳에 와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옆에서 마사지를 하고 있는 남자 맛사지사가 남편이다. 그녀의 고향 코타키나발루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며, 가 보고 싶은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마음뿐이라고 한다. 완벽한 문장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진심이 내 발을 문지르는 손을 타고, 그녀의 표정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조지타운으로 이동하기 위해 바투페링기를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바닷가로 나가보니 벌써 그녀도 일터에 나와 있다. 내가 쓰려고 가지고 왔던 피부연고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완치는 되었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서 처방해 준 연고를 준비해 가곤 한다.
남은 일정이 며칠 남았지만 다행히 그동안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건네보았다.
다른 부위에 테스트를 꼭 먼저 해 보고 발라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녀도 그러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발라보고 효과가 있으면 약국이나 병원에 가서 이 연고로 처방전을 받아 사용해 보겠다며 고마워했다.
더 많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어쩌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서 또 미안했다. 내 마음을 그녀 얼굴에 발라 나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께가 덕지덕지 앉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도 붉게 젖어드는 그녀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린다.
돈을 많이 벌어서 그리운 고향 코타키나발루에도 가고, 병원 치료도 잘 받아서 혹시 또 바투페링기를 찾을 기회가 있다면 코타키나발루댁의 맑은 얼굴을 꼭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