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바지가 펄럭일 때,
내 마음은 부서진다

by 파란 해밀


2021.01.30.


아이들이 점점 커갈수록 새로운 입학식과 졸업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름의 감회가 있지만 큰 녀석의 중학교 입학식을 잊을 수 없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와 달리 아마도 빡빡 깎은 머리와 처음 입는 교복 때문일 것이다. 오동통한 볼살에 스포츠머리를 해 놓으니 영락없는 알밤이다. 남의 옷 빌려 입은 것처럼 아직은 교복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 어느 생도만큼이나 늠름하고 대견했다.

아들과 함께 입학식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운동장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2, 3학년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무엇보다 상급생들이 입고 있는 교복 바지가 눈에 띄었다. 감색 재킷에 회색 바지인데 멀쩡한 교복 바지를 당꼬 바지처럼 허벅지는 벙벙하고 발목 쪽은 거의 붙다시피 한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내 눈에는 하나도 멋져 보이지 않는 것을, 아이들은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아주 당당해 보였다. 그 당당함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문득 옆에 있는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너는 저 형들이 입고 있는 바지 어때 보여? 보기 좋아?"
"아뇨. 별론 데요"
"너도 중학생 되면 저런 바지 입고 싶을 것 같아?"
"아니요"

혹시나 아들도 그럴까 봐 녀석의 안목을 은근슬쩍 떠 보았는데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취향이 아니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중학교 3년 내내 교복에 대한 그 어떤 변신도 꾀하지 않았다.



photo-1541267732407-8f72c182cf11.jpg © toeljimothy, 출처 Unsplash



큰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서 동복, 하복, 춘추복 종류별로 교복을 맞추었다. 특별히 체형의 변화가 심하지 않으면 더 맞출 일을 없을 거라 생각했다. 1학년 2학기 막바지 어느 초겨울,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녀석이 집으로 돌아왔다.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의 바지가 여느 때와 달랐다.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따라가면서 다시 보았다. 그건 와이드 팬츠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의 휘날리는 태극기 수준이었다.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바지야?"
"하나 맞췄어요"
"무슨 돈으로?"
"용돈 모아서 했어요"
"요즘은 이게 유행이야?"
"네. 한 번 입어보고 싶었어요"
"넌 이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네"
"너 중학교 입학식 때 기억나? 그 이상한 당꼬 바지?"
"네, 기억나요"
"그때 니가 그 바지 입은 형들 이상해 보인다고 했잖아. 너도 그렇게 보일 수 있는데?'
"그래도 입어 보고 싶어요"




photo-1603741277347-4cd1bde5844a.jpg © toeljimothy, 출처 Unsplash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녀석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그 태극기 바지를 휘날리며 학교에 갔다. 뒷모습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당꼬 바지 중학생처럼 당당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길 떠나는 투사(?)의 깃발처럼 녀석의 바지도 힘찬 의지(?)를 담은 채 겨울바람에 세차게 펄럭였다.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 친구들은 멋 내느라 애교머리를 내리거나 일부러 단발머리 끝을 둥글게 하기도 하고, 귀밑 3센티에서 조금이라도 더 기르려고 했지만 난 교복이나 머리의 변형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편의 학창 시절을 내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성향으로 봐서 기생 오라비과는 분명 아닌데 어쩌다가 저런 아들이 우리 둘 사이에서 나왔는지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삼신할미의 음주 행정(?)으로 인한 업무 착오로 밖에 둘러댈 답이 없었다.

몇 번 권유를 해보았으나 녀석은 전혀 뜻을 꺾지 않았다. 입고 다니는 바지는 간절기용이라 한겨울에 입기는 추웠지만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도 결코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입고 다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 수없이 교복점에 가서 겨울용으로 태극기(?) 바지를 하나 더 맞추었다.

교복점 주인에게 이런저런 푸념을 했지만 요즘 애들 다 그렇다고 말로는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측신을 하는 손에는 신바람이 대롱대롱 걸렸다. 그렇게 녀석은 겨울용과 여름용을 다 갖추어 놓고 사시사철 아침저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면서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았고, 남편과 나는 이를 앙다물고 버티었다.

이 또한 언젠가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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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그 바지 입었어?"
"이제부터 이 바지 입으려고요"
"이제 방황이 다 끝나셨어?"

2학년 2학기쯤, 녀석의 바지가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방황이 끝났냐는 말에 녀석은 씩 웃고 만다.

"고맙다, 아들. 그동안 엄마, 아빠가 너무 힘들었거든. 이제라도 바꿔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펄럭이는 태극기 바지의 무엇이 그토록 녀석을 매료시켰는지, 또 무엇이 갑자기 녀석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했는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녀석은 부모에게 인내의 사과나무를 심게 했고, 그 결과 나의 염통은 한 뼘 정도 더 늘어났을 것이다.

아무리 큰 나무가 쓰러져도 끝 닿는 데가 있다고 하더니......
자식이 이렇게 나를 늘려놓는구나........
자식과 함께 또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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