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도 역지사지

by 파란 해밀


2021.02.02.


"어머니, 저 오늘 보충수업 하루 안 가면 안 될까요?"
"왜?"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고2 큰 녀석이 축 처진 목소리로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중요한 시기라 수업을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학교를 못 갈 정도야? 일단 학교에 가서 정 힘들면 그때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오면 안 될까?"
".........."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맥없는 답을 뒤로하고 출근을 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났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무빈이 담임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무빈이가 학교를 안 왔습니다."
"네? 학교를 안 갔어요?"
"연락해 보시고 학교 가라고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오후 2시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떨리고,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화장실에 가서 오랫동안 손을 씻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묵직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녀석에게 쏟아부은 인내가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도 겪어온 사춘기라 그동안 누구보다 녀석을 많이 이해하려고 했지만 학교 수업까지 빼먹었다고 하니 그간의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배신감 같은 게 들었다.

당장에라도 눈에 띄면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가, 이쯤에서 마음을 놓아야 하나 했다가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고, 오후에 찾아서 학교로 보내는 것은 그른 것 같고 저녁에 퇴근해서 따져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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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근처에 살고 계시는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오면 간식이라도 챙겨주시겠다고 잠시 다녀가시곤 했는데 아들 근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빈이 어제 늦게 왔어요?"
"어제도 평소 오던 시간에 왔는데?"


전화를 끊고 정신 나간 허깨비처럼 앉아서 일을 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차츰 진정이 되니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늘 하던 일도, 꼭 해야 하는 일도, 누구나 한두 번쯤 하기 싫은 날이 있지 않던가? 나 역시 회사 다니기 싫을 때가 있고, 땡땡이치고 싶은 날이 있다. 청소하기 싫은 날이 있고, 밥하기 싫은 날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기 싫을 때가 있지 않던가?

감기 기운이 있어 몸이 무거웠으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을 테고, 어렵게 입을 떼었을 텐데도 엄마는 야멸차게 학교를 가라고 했으니 아예 녀석은 방향을 꺾은 것 같다.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 녀석도 빡빡한 일정에 묶여 공부하느라 힘들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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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해서 집에 오니 녀석은 거실에서 동생과 나란히 앉아 어머니가 썰어주신 수박을 먹고 있었다. 어미 속은 까맣게 재가되도록 다 태워놓고 속도 편하게 참 맛있게도 먹는다. 가만히 녀석 옆에 가서 앉았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 쉬었어? 내일은 학교 갈 거야?"
"..................?"

녀석은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 흰자위를 한가득 드러내며 깜짝 놀라 했다. 손에 들고 있는 베다 만 수박에는 온종일 바짝 졸인 내 속마음 같은 단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
커진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아래로 쳐지며 씨익 웃는다.


"내일은 학교 가려고 했어? 아니면 내일도 안 가려고 했어?"
"내일은 가야죠. 가려고 했어요"
"그동안 어디 갔었어?"
"만화방에요"
"실컷 만화 보고 나니까 좋아?"
"네."
"근데 왜 학교에 안 갔어?"
"그날 아침에 몸이 안 좋아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학교 가라고 하시고, 가서 선생님께 얘기하라고 하시지만 선생님한테 얘기해도 무슨 소리 하냐고 안 들어 주실 거 뻔하고 해서 그랬어요"
"몸이 아파서 그렇다는데 왜 선생님이 안 들어주셔?"
"그래요. 특히 남선생님은요. 그래서 애들도 선생님한테 얘기 안 해요. 안 들어 주실 것 뻔히 아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말도 없이 학교를 안 가면 어떡해?"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이틀 동안 그렇게 지내니까 행복했어?"
"네. 이제 다시 공부해야죠"


photo-1476480862126-209bfaa8edc8.jpg © bruno_nascimento, 출처 Unsplash



그날 속을 홀랑 다 태우고서야 역지사지를 했다. 남편에게 숱하게 했던 역지사지를 이젠 자식에게도 해야 한다. 자식은 그런 것 안 하고도 그냥 되는 줄 알았다. 내 속에서 난 자식이라 내 맘을 다 아는 줄 알았다. 같은 피가 흐르고, 내 성격의 반을 갖고 있어서 절로 아는 줄 알았는데 자식이나 남편이나 역지사지 담금질을 시키는 데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웬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생각해 보면 녀석들도 공부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 밖 경쟁 사회에서 직장 생활하는 어른들에 비하면 학교 안에서 공부만 하는 것이 세상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야 아는 사실이고, 나 또한 학창 시절에 그렇게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빨리 졸업만 해라, 빨리 졸업만 해라,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시험과 공부는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아?라고 했던 천지도 모르는 올챙이 시절이 있지 않았나? 내가 그랬듯이 아이들도 더 큰 시련을 알지 못하니, 공부만 해야 하는 학창 시절이 가장 힘든 시기로 알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가끔 버티게 해주는 나름의 숨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꽁꽁 밀봉하려 했던 내가 무안해진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조금만 자리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제법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날, 아들은 약속대로 조금 더 편안해진 얼굴로 학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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