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2. 05.
큰 녀석이 수능을 마쳤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흔들리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때때로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무탈하게 그 과정을 잘 마무리한 것 같다. 커다란 산을 넘은 녀석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쌍둥이처럼 내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대학 입학까지 남은 기간 동안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다니던 헬스장을 함께 가기로 했다. 거리가 멀면 가기 싫을 때가 있을 것 같아 집 가까운 헬스장을 다니고 있었다.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날도 퇴근해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들과 함께 운동을 하러 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둘이 같이 걷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능을 막 마친 때라 그동안 공부한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그날그날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어머니, 저도 이다음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처럼 제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
얘기 끝에 아들이 무심코 말을 건넸다. 녀석의 말이 둔탁하게 내 명치를 친다. 얼른 답을 하지 못했다. 안간힘을 쓰며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던 무엇이 후루룩 한순간에 풀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찾아드는 나른한 홀가분함이 쏟아져 내렸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어머니는 항상 저희들을 이해해 주려고 애쓰셨잖아요"
"아이고! 아들~~~, 그걸 알았어?"
"알죠"
"알아주니 고맙네. 근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그래도 일단 그렇게 해보려고요"
"그렇게 해보고 잘 안되면?"
"그래도 안되면 혼을 내야죠. 하하하"
"그래, 너도 이다음에 너 같은 아들 낳아서 키워 보면 알 거다"
"하하하하하"
녀석의 웃음소리가 겨울 저녁거리에 퍼져나간다. 그동안 겪었던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스쳐간다. 무심한 녀석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무심하다고 무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조개처럼 꼭꼭 앙다문 채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녀석, 3시간을 기다려 겨우 말 한마디를 선물처럼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꺼워했던가? 더디지만 기다리고 지켜보려고 애썼던 나의 노력이 녀석들에게 제대로 스며들기는 했을까 싶었는데 그날 녀석이 한 말은 수년을 견딘 나를 들썩이게 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불안할 때도 있고, 못 미더울 때도 있다. 단번에 내가 나서서 일러주고 싶고, 처리해 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애써 인내하며 지켜보았던 것은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스스로 느끼고 일어서야 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옆에서, 때로는 뒤에서 나직이 조언을 건네긴 해도 아이들을 앞서 가지 않으려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믿고 지켜봐 주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흙에 뿌린 씨앗도 싹을 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 움트고 꽃 피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유달리 자식에게만은 느긋하게 기다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이고, 부모라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참아내고 기다려주어야 하는 이유는, 내 속이 타들어 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녀석들도 저들의 그릇에 생각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차고 있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을 뿐. 안으로 안으로 소리 없이 채우고 스스로 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