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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농 Dec 12. 2022

시 마주: 너도나도 겨울 보리다

이원수 '겨울 보리'

어제 같이 밥을 먹는데, 아들이 수학 학원에 보내달라 했다. 다니고 싶은 학원도 친구들을 통해 다 알아놨는지, 학원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저녁 7시에 시작해서 밤 10시에 끝난다고 한다.

"너 수학 시험 봤구나. 왜 얘기 안 했어? 엄마랑 더 공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

"몇 점 맞았어?"

"......"

"50점 아래야?"

"아마 그쯤? 몰라, 아직 시험지 안 받았어."

엄마는 아직 널 수학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다 하니, 엄마는 왜 나에게 돈 쓰기를 싫어하는 거냐며, 나도 수학을 잘하고 싶다며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서 표정이 좋아진다.

이 녀석, 먼저 선수를 친 거다. 수학 점수에 야단맞지 않으려는.


오늘 아들 가방에서 수학 시험지를 꺼냈다. '48점'이라는 점수를 보니 나도 모르게 한 숨이 나왔다. 아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피아노 학원에 갈 시간인데도 가지 않고, 소리 내 울었다.

"나도 내가 미워!"


아들을 안아주고, 위로의 말을 해주고,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그리고 아들이 받아 온 6학년 2학기 5단원 원의 넓이 수학 시험지를 찬찬히 훑어봤다.

이런, 내가 우리 반 아이들과 본 시험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렵다. 게다가 문제 개수가 25개나 된다. 1교시 시간이 40분이니, 한 문제 푸는 평균 시간이 1분 30초나 될까? 많은 문제 유형을 풀어 본 아이들에게 익숙한 문제 유형이다. 꼬아서 꼬아서 낸 문제들.  


나도 학교 선생님이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왜 이렇게 문제를 어렵게 내는 걸까? 6학년 2학기 4단원 비례식과 비례배분부터 5단원 원의 넓이까지가 절정이다. 4, 5단원이 다른 단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보다는 문제집이나 학습지에 6학년 2학기 수학 교육과정 수준을 넘어선 문제들이 대거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수학 교과는 많은 다이어트를 했다. '다양한 식(방정식)'에 대한 부분을 중학교 과정으로 모두 올렸다. 경우의 수, 확률 부분도 그렇다. 교육과정은 이렇게 바뀌었는데, 수학 문제집(가정용, 학원용 모두 다)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단원의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면, 중학교 1차 방정식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초 6학년 실력, 심화 문제로 나온다. 교과서 수준보다 어려운 문제들로 잔뜩 구성된 시험을 보고 나서, 당연히 아이들의 점수는 급락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굳은 결심을 한다.

'내 아이가 수학을 못하는구나. 학원에 보내야지.'


오늘 나도 반 아이들과 수학 단원평가 시험을 봤다. 지난주 화요일에 교과서 진도가 끝나고,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일 동안 수준별 수학 학습지를 풀었다. 기본(5장), 실력(2장), 심화(1장) 3단계로 구분해 학습지를 준비하고, 모두가 기본 학습지부터 풀게 했다. 실력 학습지는 모둠별로 서로 가르쳐주며 해결하게 했다. 심화 학습지는 풀고 싶은 아이들만 풀게 했다. 그렇게 여러 문제 유형 트레이닝을 하게 한 후, 학습지를 집에 가져가 더 공부하게 했다. (집에 가져가게 했더니, 몇몇 아이들이 내가 만든 학습지를 학원에 가져가, 학원 선생님과 주말 동안 공부했다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리고 교과서 문제와 기본 학습지 5장, 실력 학습지 2장에서 문제를 재구성해 단원 평가지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해서, 다행히 우리 반은 급락한 아이들이 생기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건 이번에는 100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80~90점대를 맞다 이번에 70점대를 맞은 아이들이 두 명 생겼다는 것.   


아들은 학원에 가지 않는 대신, 저녁에 나와 함께 수학 공부를 한다. 수학 문제집을 정해, 하루에 한 두 장 풀고, 틀린 것을 다시 풀어본 후, 그래도 모르면 내가 가르쳐주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10문제에 1~2문제 틀린다. 심화 문제 같은 경우는 10문제에 3~4문제 정도 틀린다. 역시 문제집 심화 문제는 어렵다. 가끔 나도 모르는 문제들이 나온다. 그렇게 공부한 아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점수는 48점.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안하다는...


아들아.

우리 좀 더 버티자.

언젠가 너도 학원에 가야하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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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보리

- 이원수


밟자, 밟자.

보리를 밟는다.

추운 겨울 파아란

보리를 밟는다.


오빠는 꽉꽉 밟으라지만

보리가 아플까 봐 살금살금……


먼 먼 하늘엔 쬐끄만 해가

우리 그림자 길게 길게

늘려 준면서

잘 한다, 잘 밟는다

눈짓을 하네.


이 추운 겨울에

파아란 보리,

얼지 말고 병 없이

잘만 크거라.

따순 봄, 더운 여름

그 때까지.


* 표지 사진은 우리 반 텃밭 모습입니다. 겨울을 버티고 있는 청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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