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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Nov 25. 2021

도시지만 시골입니다

<도봉쓰담> 도봉살이 칼럼

 

 서울의 끝자락 도봉구 도봉동 무수골에는 무지개 논이 있다. 양 갈래 논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시선을 끌고 머물게 되는 스팟이다. 고즈넉한 논밭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이곳은 살면서 어딘가 흘리고 온 고향을 찾은 착각이 들 만큼 유유하다. 길의 가장자리에는 우물로 쓰였다는 차갑고 투명한 계곡이 나지막하게 흐른다.


 무수골에도 자연스러운 시간이 찾아왔다. 연둣빛 잎사귀로 빽빽하게 무성했던 도봉산이 초록색으로 진해지더니 점점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갔다. 도봉산과 어우러진 논밭을 사진 찍으면 새파란 하늘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햇볕이 드리워져 노랗다 못해 금싸라기 같은 벼가 차분한 엽서 한 장처럼 보인다. 논밭 주변에는 알맹이가 쏙 빠진 밤송이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모자를 뒤집어쓴 도토리가 발에 차여 굴러다닌다. 도토리를 집어 들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으로 던져준다. 다람쥐와 청설모가 운 좋은 날 발견할 것이다.


 자연의 생물들이 겨울준비로 한창일 때 나지막한 카톡 알림이 들려왔다. 벼 베기를 할 때가 되었으니 무지개 논으로 출동하라는 소식.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 베기. 무수골 이웃들이 알고 있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세종대왕 열 일곱번째 아들 영해군, 그의 후손들이 지켜온 무수골에는 가을 이맘때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벼 베기 체험을 한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반가운 소식이다. 단호하게 추워진 가을바람에도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잠바를 껴입고, 마스크를 쓰고, 장화를 신고, 장갑을 낀 아이들이 웅성웅성 모여든다. 바람이 어르고, 햇볕과 비가 살뜰히 키우던 흑미, 홍미, 쌀알의 알곡들이 더 이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 농부의 88번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그중에 오늘은 벼를 베고, 홀태로 벼 이삭을 훑어내고, 낟알을 도정하고, 키질하는 마무리 단계를 경험할 수 있다. 한 주먹의 쌀알을 아이의 손에 들려주기까지 옛날 선조의 방식을 따라보는 것이다. 먼저 아이들에게 낫을 쥐여주었다. 무수골에 터를 잡고 사는 어르신들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낫의 날을 잡는 방법부터 낫질하는 방향까지 꼼꼼하게 알려준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호기롭게 손으로 곡식을 한 줌 잡고 낫질을 시도한다. 생각보다 싹싹 잘리지 않아서 당황하는 눈치다. 벼의 뿌리가 땅에 단단히 박혀 지탱했던 무게에 아이들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다시 굽힌다. 곧이어 콤바인 기계가 논밭에 들어서자 듬직한 말처럼 푸드덕거리며 주행한다. 질서 정연하게 곡식들이 차례차례 눕자 겨가 분리된다. 벌거숭이가 되는 밭에서 길을 잃은 청개구리가 뛰어다닌다.


 콤바인이 미처 닿지 못한 고랑에 남아 있는 벼를 아이들과 낫으로 벤다. 싹둑. 이제 요령을 터득했는지 쉽게 잘린다. 아이들이 웃으며 벼를 한 다발 안아본다. 매일 먹는 흰밥의 태곳적 고향이어서 그런지 생명이 깃들고 푸근하다. 낫으로 자른 벼를 뾰족한 빗처럼 생긴 홀태에 벗겨낸다. 낟알이 우수수 땅으로 떨어지고 볏짚만 남는다. 볏짚은 잘게 잘게 썰어서 논에 뿌려두면 썩어서 거름으로 쓰일 것이다.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낟알을 주워 모아 도정 기계에 연필깎이를 돌리듯 원을 돌리다 보면 얇은 껍질(왕겨)이 벗겨진 쌀알이 모인다. 키에 쌀알을 두고 까부르자 껍질이 훌훌 날아간다.


 곡식의 줄기에서 알알이 맺힌 쌀알이 여물기까지, 딱딱한 낟알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밥 뭉텅이가 되어 입안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익어간 것일까. 웅크리고 있던 쌀알이 서로 모이자 윤기가 흐르고 생기 있어 보인다. 때가 되면 우리도 그럴 것이다. 우리도 훌렁훌렁 모이면 밥 한 그릇의 따뜻한 온기를 나눌 것이다. 인솔하셨던 선생님은 미지근한 물에 쌀을 불려 왕겨가 완전히 벗겨지면 밥을 꼭 지어먹어보라고 하셨다. 밥 한 그릇의 가치는 얼마인지 돈으로 환산하여 값을 매겨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벼 베기로 휑해진 밭에 바람이 세게 불어온다. 동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어르신은 언제나 그랬듯이 땅 갈이를 위해 트랙터로 한바탕 논을 일구고, 논바닥에 물을 가득 부어 놓으실 것이다. 아이들이 겨울에도 무지개 논을 찾아와 눈썰매를 타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얼음판 위를 가르며 놀기를 바라는 어르신의 넉넉한 인심이다.


 금방 겨울이 오면 냇가에는 고드름이 맺히고, 앙상해진 나무가 스산하게 흔들거리고, 떨어진 낙엽은 부서지고, 무수골에 사는 생물들은 숨을 죽일 것이다. 겨울이 한 차례 지나가고 봄이 오면, 지금 서 있던 이곳에 우리는 모내기하러 다시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청개구리와 두꺼비, 도롱뇽과 지렁이, 물방개가 찾아들 것이다. 생명의 환희가 뽀글뽀글 태어난 그곳이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다. 아이들은 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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