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g Green Grads Sep 08. 2021

세제 도둑 검거 작전

Detective Plan for a Detergent Theft

이것은 내가 아직 캠퍼스에서 종종 길을 잃곤 하던 풋풋한 새내기 시절의 일이다. 당시 내 기숙사는 감사하게도 Choates 클러스터 Brown동에 있는 1인실이었다. 

추억의 Choates 클러스터

보통의 닭장 같은 1인실과는 달리 내 방은 바로 옆 방인 2인실과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시작부터 이상한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차에 1인실을 배정 받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내가 배정받았던 1인실은 과장을 좀 보태서 거의 호텔 수준이었다. 1학년 기숙사 복불복에 큰 행운이 따랐으니 불만을 갖지 않는 것이 도리였겠지만, 그래도 정말 티끌만한 불만이 하나 있다면 방이 꼭대기층에 있다는 것이었다. 꼭대기층이래봐야 3층이긴 했지만 말이다.


“애개. 겨우 3층 가지고? 복에 겨운 소리 집어 치워라!”


좁은 2인실을 써야 하는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며 내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 비록 엘레베이터가 없긴 하지만, 3층은 평소 생활하는 데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층 수이다. 하지만 이사를 해야 한다거나, Brittle (Brown동과 Little동 사이에 위치한 공용 공간으로 거실과 부엌, 공용 프린터가 있다. 사진에서 보이듯 2층에서 구름 다리를 통해 이어진다)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재료를 잔뜩 들고 간다거나, 무거운 택배 혹은 짐을 들고 올라가야 할 때 3층의 체감 높이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엠파이트 스테이트 빌딩 수준이었다. 


사실 이삿짐 나르기야 1년에 두 번만 하면 되고, 요리를 할 때는 친구들을 불러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면 되고, 그렇게 무거운 택배가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빨래 타임이었다. 코스트코 쇼핑과 대량구매를 사랑하는 우리 아빠는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던 탓인지 음식과 물건을 구입할 때 손이 좀 많이 크신 편이다. 해노버로의 이사를 준비하던 9월 어느 날, 아빠는 코스트코에 다녀오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액상 세제를 자랑스럽게 꺼내놓으셨다.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더 컸을지도...)

“딸! 이 정도면 1년 내내 세제 안 떨어지겠지?”

“헐, 아빠… 해노버가 아무리 깡촌이라도 세제는 팔지 않을까?”


사실 가정용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용량 세제라 다소 당황스럽고 웃기기도 했지만, 문제의 세제는 다른 짐들과 함께 차에 실려 뉴욕에서 해노버까지 이동, Brown동 301F호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과 바쁜 일상 속에서 어느새 기억에서 희미해진 이 세제는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빨래를 하던 날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선 3층에서 지하 1층에 있는 세탁실까지 내려가면서 세제의 무게가 5kg은 족히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름 집안일을 좀 한다고 자부하는 나는 흰 옷과 색깔 옷을 두 개의 빨래 바구니에 분리해서, 흰 옷은 온수에, 색깔 옷은 냉수에 세탁하는데 빨래 바구니 두 개와 5kg의 세제를 한 번에 들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갈 수 없어 두 번을 왕복해야 했다. (사실 중간에 건조기로 옮길 때 한 번, 마지막에 가지러 또 두 번 내려가야 하니 총 다섯 번 왕복이다.) 2주 정도 매 주 이렇게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세탁실 선반 이름과 방 호실 번호를 쓴 세제들이 줄줄이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잇, 그냥 여기에 이름 써서 놓고 다니면 되는데 그 동안 괜히 생고생 했구먼’


나는 그 날로 무거운 세제에 이름과 동 호수를 크게 써 붙인 후 세탁실 선반에 두고, 두 개의 빨래 바구니만 가뿐하게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3층으로 올라왔다. 선반 혁명 이후 바쁜 한 달이 지나고, 매 주 편하게 빨래를 하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용량을 자랑하던 세제가 놀라운 속도로 줄어들어 굉장히 가벼워진 것이다. 1년은 족히 쓰고도 남을 양이었는데 두 달도 못 가서 반이 넘게 줄어들다니! 


짐작컨대 세제가 다 떨어졌거나 세제를 방에 두고 온 사람들이 선반에 있는 세제 중 가장 용량이 커서 조금 훔쳐 쓰더라도 티가 덜 날 것 같은 내 세제를 계속 사용한 듯했다. 그리고 모두가 생각한 것이 거기서 거기였는지 다들 내 세제만 사용한 것이다. 물론 내가 세제를 매 번 방으로 옮겼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 일이 몹시 괘씸하게 느껴져 범인을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범인이 한 두 명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한담…?’


CCTV를 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계속 몰래 보고 있을 수도 없고… 고민하던 차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도록 세제에 파란 물감을 타서 빨래한 옷이 다 시퍼렇게 나오게 만들어 버리자! 


다음 날, 나는 타운에 있는 Beans 아트 스토어에 가서 코발트 블루 색 수채화 물감을 세 통 샀다. 아크릴 물감은 빨리 응고되어 덩어리가 진다. 자칫 세탁기가 고장 나면 내가 오히려 더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기 때문에, 미술 전공자의 치밀함을 발휘하여 물에 잘 녹는 수채화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쓸 세제를 적당히 덜어 다른 통으로 옮긴 후, 그 세 통을 모두 짜서 남은 세제에 섞었다. 이 것은 세제 향을 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색을 보니 일반 세제보다 조금 더 파란 기가 돌아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가지고 있던 물엿을 적당히 섞어 농도를 맞추었더니, 누가 봐도 완벽한 세제가 탄생했다. 나는 후후훗 웃으며 그 세제를 다시 선반으로 가져다 놓았다.


며칠 후, 1층에 살던 어떤 남학생의 옷이 세탁기에서 온통 파랗게 나왔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었다. 멍청한 그 아이는 청바지를 잘못 빨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청바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고 다녔단다. 옷이 온통 시퍼렇게 나온 후, 세제에 써 있는 이름과 방 호실 번호를 보고 찾아와서 항의한다면 


“그러니 네가 남의 세제를 훔쳐 쓰지 말았어야지! 네가 도둑질을 안 했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니?”


라고 면박을 줄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세제에 물감을 탄 사실을 눈치챘어도 찾아와 화를 내는 건 도리어 도둑질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그냥 모른 척 다른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0% 내가 의도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세제 도둑 중 한 명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며 검거 작전이 종료되었다.


Written by Ellian

Cover Photo by pressfoto
(The images in this post are irrelevant to the story)

이전 05화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feat.이삿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