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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Sep 08. 2021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feat.이삿짐)

Somewhat Accurate Correlation Analysis

처음 기숙사에 들어오는 신입생의 이삿짐 양을 보면 학생의 출신 지역을 대충은 알 수 있다. 우선, 짐을 가장 많이 가져온 학생은 십중팔구 미국 동부 출신이다. 부모님의 SUV에 들어가는만큼 잔뜩 때려넣고 운전을 해서 캠퍼스까지 온 경우이니, 당연히 짐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가끔 부모님 차 2대를 동원해서 오는 경우도 있다. 짐을 뭔가 대충 비효율적으로 싸왔다면, 역시 동부 출신일 확률이 높다.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다보니 짐을 간소화할 이유가 없어서 박스나 바구니에 넣어지는대로 얼기설기 싸오기 때문이다. 


한편, 몸집만큼 큰 이민가방 여러개를 낑낑대며 끌고 가는 학생은 높은 확률로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다. 이삿짐의 양으로 보면 유학생들은 뜻밖의 2위인데, 험난한 객지생활(?)에 대비해 오버차지를 감수하고서라도 온갖 물건을 바리바리 챙겨오기 때문이다. 온갖 상비약을 챙겨오는 것은 애교이고, 미국 생리대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1년치 한방 생리대를 챙겨오는 학생들부터, 고향의 맛이 그리울 것을 대비해 음식을 싸온 학생들, 추운 겨울에 대비해 전기매트를 가져오는 학생들까지! 유학생들의 패킹 리스트는 뭔가 기상천외하다.


짐이 가장 적은 학생은 미국 타지역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중부, 남부, 서부 출신의 학생들은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기 때문에, 짐을 너무 많이 싸오면 그만큼 다 돈이다. 국내선은 국제선에 비해 기본 무료 수화물 허용량도 적은 편이다. 게다가 다트머스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 공항에서 캠퍼스까지는 버스로 또 2시간 반을 와야 하기 때문에 짐을 많이 가져오면 굉장히 번거롭다. 비싼 비행기 오버차지를 내고 들고오는데 생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일단 당장 필요한 것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집에서 그때그때 택배로 받는 편이 가격 면에서 훨씬 나아서 미국 타지역 학생들은 보통 짐이 적은 편이다. 


출처: Modern Family Season 4 Episode 2 <Schooled>
▲ Freshman Move-In Day의 흔한 풍경! 
부모님과 가족들이 총출동해서 짐을 함께 옮기고 굿바이 허그를 하는 모습이지만...
혼자 모든걸 해결해야하는 유학생들에겐 이런 훈훈함과 따스함은 없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만 한다...!


나 역시 동부 출신 답게 처음 학교에 올 때부터 짐을 많이 가지고 왔고, 심지어 방학을 맞아 집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물건들(ex. 침대 위에서 컵라면을 먹기 위한 뽀로로 책상)을 잔뜩 들고오곤 했다. 게다가 캠퍼스 생활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로 인한 습관성 온라인 쇼핑 증후군으로 살림살이가 점점 늘어나기도 했다. 깡촌에 쳐박혀서 별다른 낙이 없다보니, 다들 자꾸 뭔가를 사들이게 되는 것이다. 촌구석 대학생들의 한줄기 빛인 아마존은 ".edu"로 끝나는 이메일로 가입하면 대학생들에게 1년간 무료로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구매 금액에 관계 없이 무료 배송을 해줘서 나의 습관성 온라인 쇼핑 증후군을 악화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1학년이 끝나고 난 뒤였다.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가기 전 이 모든 짐을 포장해서 창고에 맡겨야 했는데 하필 기말고사로 멘탈이 이미 다 부서진 뒤였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짐을 싸야하는 건 알겠는데 멘탈이 너덜너덜해서 의욕이 하나도 들지 않았고, 나는 간신히 대형 박스만 사다 두고 포장과 창고 보관을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다. 게다가 막상 상자에 포장하려고 보니 쓸데없는 물건은 왜 이리도 많은지... 이건 또 언제 샀지...? 내가 이렇게 호더였나...? 별의 별 생각을 하면서 정리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기숙사를 비워야하는 날짜 직전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 앨리안 언니와 혜령 언니에게 급한 문자를 보냈다.

“언니들 미안한데 나 오늘 점심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내일 출발하는데 아직도 짐을 거의 못 쌌어.”


앨리안 언니가 호기롭게 답장했다. "무슨 그런 일로 밥을 굶어? 짐 그까짓 거 두 세 시간이면 싸는 거지 뭐.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일단 밥부터 같이 먹자.” 밥을 먹고 함께 내 방으로 돌아오니 상황이 꽤 심각했다. 뉴욕 출신의 나는 신입생 때 1인실에 배정받았기 때문에 처음 다트머스에 올 때부터 짐을 많이 가지고 온 것은 물론, 방학 때 집에 갈 때 마다 엄마 카드 찬스를 활용해 새로운 물건들을 많이 구매해 들고 왔던 것이다. 뭣 모르고 방에 산더미처럼 들여 놓은 물건들은 짐을 싸서 창고에 맡겨야 할 때가 되자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앨리안 언니와 혜령 언니는 그래도 다트머스 짬(?)이 있는 선배들답게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기에 절친 송희까지 가세하니 본격적인 이사 어벤저스가 완성되었다. 두 시간 동안 빠른 속도로 짐을 모두 박스 안에 넣어서 테이프로 밀봉한 그들은 상자를 모두 1층으로 내린 후 손수레를 빌려와 상자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창고에 짐을 맡기러 가려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난감한 마음에 계속 창 밖을 내다봤지만 비는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써도 온 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왔고, 우체국에서 산 종이 상자에 짐을 싼 터라 내용물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 순간에도 째깍, 째깍! 창고 운영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당장 다음날 새벽 6시 30분에 뉴욕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티켓을 사놓은 상태였고, 집에 가기 전에 무조건 짐을 창고에 맡기고 기숙사를 비워야 했기에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우리 이사 어벤저스 4인은 온 몸이 홀딱 젖어가면서도 상자에 우산을 씌워서 간신히 가장 가까운 창고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창고는 부지런히 미리 짐을 맡긴 학생들의 짐으로 그 거의 꽉 찬 상태였고 내 짐이 워낙 많았던 터라 일부 상자들만 보관이 가능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우리 이사 어벤저스를 쳐다보던 직원은 아직도 비어 있는 창고들을 알려주었는데, 위치가 좋은 곳은 하나도 없고 하필 캠퍼스 끝자락에 위치한 창고들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단 그 곳에는 맡길 수 있는 만큼만 맡기고 다시 폭우를 뚫고 손수레를 밀어서 직원이 말한 창고에 도착했다. 상자는 비에 흠뻑 젖어서 마치 내 멘탈처럼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채로 간신히 창고에 들어갔다. 안에 내용물이 멀쩡할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도무지 그것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정도로 기진맥진 했기에 걱정은 다음 학기의 나에게 미뤄두고 그냥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비를 잔뜩 맞은 채 창고에 들어간 상자들이 화가 나서 저주를 내렸는지, 그 이후로도 이상하게 내가 이사를 하는 날이면 꼭 비가 내리곤 했다. 한국에서는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사 할 때마다 비가 왔던 나에게 이 말은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2학년 가을 학기가 끝나고 이사를 하던 날이었다. 하늘이 불길하게 우중충하더니 결국 비가 내렸다. '데자뷰인가...?' 게다가 전날 별 생각없이 늦게까지 과음을 하는 바람에 숙취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직 술도 덜 깬 상태로 오렌지 주스로 숙취를 간신히 달래며 짐을 같이 옮겨주기로 한 동기 성준이에게 연락을 했는데 성준이도 숙취가 있었는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알고보니 다른 선배의 이사를 도와주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나는 유일하게 함께 캠퍼스에 남은 민경이와 같이 비를 맞으며 짐을 옮겼다. 옷은 축축해지고... 짐도 다 젖고... 서러움은 폭발하고... 지금 돌이켜봐도 최고로 우울한 날 중 하나이다. 


이렇게 한 두번의 이사 경험을 한 후에는 너무 힘들어서 짐을 최대한 줄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별로 줄어들지 않은 박스를 학기가 끝날 때마다 힘겹게 옮기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왜 난 박스 하나 같이 옮겨줄 남자친구도 없을까...?' 이삿날은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1년 중 유일하게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날이었다.


Written by Ha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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