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uble-edged Quarter System of Dartmouth
한국 대학의 99%가 채택하고 있는 학기제 (Semester System)가 1년을 13~16주 길이의 2개 학기로 구성한다면, 한국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학사 시스템인 쿼터제 (Quarter System)는 1년을 10주 길이의 4개 쿼터로 구성하는 학사제이다. 미국 서부의 스탠포드 대학, 칼텍, 그리고 UC계열의 학교들이 쿼터제로 운영된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트머스는 아이비리그 중 유일하게 쿼터제로 운영되는 대학이다. 하지만 다트머스는 매 년 4개 중 3개 쿼터만을 수강하면 졸업 학점을 채울 수 있으므로 사실상 쿼터제의 탈을 쓴 트라이메스터제 (Trimester System)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쿼터제인듯 쿼터제 아닌 쿼터제 같은 다트머스만의 이 독특한 학사일정을 디플랜 (D-Plan)이라고 부르는데, 졸업할 때쯤 되면 친숙해지는 아래 표는 디플랜의 규칙이 표시된 디플랜 워크시트다.
우선 R은 ‘In Residence (재학)’을 의미하는데, 1학년과 4학년 가을, 겨울, 봄은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재학해야 한다. 이는 신입생의 적응과, 졸업 예정 학생들의 졸업 준비를 돕기 위한 것이다. 2학년 여름은 학교의 전통인 ‘Sophomore Summer’라고 하여,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재학해야 한다. 이렇게 의무적으로 재학해야 하는 7쿼터를 제외하고 졸업에 필요한 나머지 쿼터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다트머스가 쿼터제를 채택한 이유는 “학생들에게 보다 다양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학기제 학교의 학생들은 휴학을 감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해외 여행, 봉사 활동, 인턴쉽 등에 여름, 겨울 방학만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한 쿼터를 ‘합법적으로’ 수강할 필요가 없는 다트머스 학생들은 일 년 중 아무 때나 원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 대학생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턴쉽 또한 미국 전역의 모든 대학생들이 인턴 자리를 구하는 ‘피크 시즌’인 여름과 겨울의 치열한 경쟁을 피해 봄·가을을 적극 활용,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여기까지가 바로 학교의 공식적인 설명이자, 이론적으로는 굉장히 이상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만큼 아름답지 않다.
(1) 체감 속도가 LTE급
쿼터제는 체감 속도가 정말 빠르다. 학기제에서 ‘기초 화학의 이해’라던가 ‘선형 대수학’을 들었다면 보통 15주에 걸쳐 소화하는 커리큘럼을 다트머스에서는 10주만에 소화해야 한다. 수업 진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라 수업을 한 번만 빠져도 타격이 굉장히 크다. 아파서 수업에 못 갔다면 회복하자마자 발에 땀나게 뛰어야 간신히 따라 잡을 수 있고, 늦잠을 자서 못 갔다면 중간고사 전날 밤 스스로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엊그제가 첫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교수님께서 칠판에 중간고사 날짜와 시간을 공지하고 계시고, 첫 번째 중간고사가 끝나서 숨을 좀 돌릴까 하면 두 번째 중간고사가 코앞이다. 자연히 벼락치기는 일상, 밤샘은 (강제) 옵션이 된다. 이런 환경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굉장히 성실하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로, 나처럼 평범하고 게으른 학생의 경우 주어진 리딩을 해가고 과제를 제 때 내는 것도 매우 벅찼다.
“나는 매 쿼터마다 예닐곱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돌리며 걷는 서커스 단원이 된 것만 같아. 잠깐만 한 눈을 팔아도 접시 하나가 떨어져서 전체 균형이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달까?”
한 친구가 세 과목의 수업, 연구, 그리고 저마다의 다양한 학업 외 활동을 접시에 비유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큰 공감이 되었다. 다트머스에서의 매 쿼터는 그야말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적(?)을 쏘기에 바쁜 전쟁터이다. 그리고 쉴틈없는 전투는 전세가 어떤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되짚어볼 여력도, 동료는 잘 하고 있는지 챙길 전우애도 없어질 만큼 치열하다. “같이 밥 한 번 먹자”는 작년 기숙사 플로어메이트들과의 약속은 바쁜 일상 속 공수표가 되어 버리고, 꼭 참석하리라 마음먹었던 재미있는 학내 행사들은 각종 핑계로 잊혀져 간다.
다트머스 학생들 중 졸업하고 컨설팅을 업으로 삼는 학생들이 유독 많은데, 이는 그들이 짧은 시간 안에 휘몰아치는 다양한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극단적 스트레스 환경에 이미 단련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2) 일정 파탄· 동아리 파괴의 주범
쿼터제 학교에 다니면 학기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일정이 거의 맞지 않는다. 친구들의 봄방학 중 SNS에 #Finally, #Reunion, #Longtimenosee 따위의 태그와 함께 나만 쏙 빼놓고 올라오는 고등학교 절친들의 재회 모임 사진은 당장 기말고사를 목전에 둔 나에겐 짜증나는 염장질에 불과하다. 드디어 시험이 모두 끝나고, 기다리던 친구들의 품에서 그간 봉인해 두었던 흥을 분출하려니, 젠장. 친구들의 방학이 끝났단다. 결국 혼자 집에서 그간 보지 못해 밀린 드라마나 밤새 보고 있자면 조금 서러운 마음이 든다.
학기 중에 잠깐 짬을 내어 미국 전역에 뿔뿔이 흩어진 친한 친구들끼리 짧은 여행이라도 가려면, 혹은 가족의 생일을 맞아 잠시 집에 모이려면 나는 언제나 일정 파탄의 주범이 된다. 학기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을 포함한 학사 일정이 비슷해 일정을 짜는데 큰 무리가 없지만, 내 일정까지 맞춰보려는 순간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의리로 끝까지 어떻게든 모두에게 가능한 스케줄을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나는 여행 혹은 가족 모임에서 ‘열외’된다.
일정이 맞지 않는 것은 다른 학교 사람들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디플랜이 완전히 반대인 경우, 같은 다트머스 학생들끼리도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실제로 나는 1학년 봄 쿼터가 끝날 때 마지막으로 본 친구를 3학년 가을 쿼터가 되어서야 다섯 쿼터 만에 다시 만난 적이 있는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디플랜의 부작용을 가장 정면으로 맞는 것 중 하나가 동아리, 그 중에서도 신생 동아리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동아리는 임원 한 명이 한쿼터쯤 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도 하고, 임원을 맡으면 몇 쿼터간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내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신생 동아리는 정말 열정적인 학생 한 명과, 그 학생의 설득으로 들어온 주변인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이런 동아리에서 회장으로서 일당백의 역할을 소화하는 학생 한 명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동아리의 존폐에 영향을 미친다. 회장만큼의 열정과 능력을 가진 ‘후계자’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때 회장이 다음 쿼터를 쉬게 되면 동아리가 공중분해되는 경우도 흔하다.
“디플랜을 구상한 사람은 아마도 친구가 하나도 없는 독고다이 스타일이었을 거야.”
“누가 아니래? 아마 동아리 활동도 하나도 안하고 공부만 하다 졸업한 사람일거야.”
나는 종종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다트머스 친구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3) 대세에는 이유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자유롭게 한 쿼터를 쉴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름 혹은 겨울에 쉬는 것을 택한다. 디플랜이 처음 구상되었을 때 학교의 이상은 아마도 ‘학생들이 봄·가을에는 낮은 경쟁률에 쉽게 인턴쉽을 구할 수 있겠다’이라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대학생들의 수요가 가장 큰 여름, 겨울에 채용과 연계되는 공식 인턴쉽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홈페이지 혹은 인사과 이메일을 통해 이력서를 상시 받는 시스템을 갖춘 기업들도 우수한 학생들의 이력서를 모아두었다가 공식 프로그램에 묶어서 선발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은 기업의 인턴 채용 시기에 맞춰 쉴 쿼터를 정할 수밖에 없다.
학교 역시 봄, 가을에 상대적으로 많고 다양한 수업을 제공한다. 아마도 교수님들 역시 사람인지라 해노버의 여름과 겨울보다는 봄, 가을을 선호해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하지만 봄·가을로의 쏠림 현상이 심하다 보니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을 여름·겨울 학기로 유인하기 위한 각종 사악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리즈로 이어서 들어야 하는 수업을 가을-겨울, 봄-여름이 이어지도록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예과 학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인 유기화학의 경우, 가을과 봄 쿼터에 ‘유기화학 I’, 겨울과 여름 쿼터에 ‘유기화학 II’를 제공해 겨울과 여름을 피할 수 없도록 설계해 두었다. 정말 잔인하고도 영리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쿼터제는 정말 장점이 하나도 없을까? 8월 말 혹은 9월 초에 개강하는 학기제 대학과는 달리 다트머스는 9월 중순이 지나, 대개 한국의 추석쯤 개강한다! (물론 늦게 개강하는 만큼 종강이 늦으니 다소 조삼모사 격이다.) 학생들에게 시간 활용의 유연성을 주고자 했던 학교의 계획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다.
디플랜은 시스템 상, 4년간 총 15쿼터 중 12쿼터만 수업을 들으면 된다. 학점으로 인정받는 AP/IB 크레딧을 보유한 경우나 4개 수업을 들은 학기가 있는 경우, 혹은 복수 전공이 없는 경우에는 10 혹은 11쿼터 만에 졸업 학점을 채우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디플랜 설계를 잘 하면, 2학년이나 3학년 때 3쿼터 연속으로 거의 1년을 쉬고도 동기들과 함께 졸업할 수 있다. 일종의 휴학을 한 효과가 나는 것이다. 1년이라는 자유시간은 몇달 남짓한 여름, 겨울 방학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장점이긴 하다. 장기 인턴쉽으로 원하는 분야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배울 수도 있고, 인류학 논문을 쓰는 경우, 학부 수준에서는 꽤나 제대로 된 민속 지학 연구(ethnography)를 할 수도 있다. 시간에 비교적 덜 구애받으며 여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고, 수박 겉햝기식이 아닌 제대로 된 해외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나처럼 12쿼터를 연속으로 듣고 조기졸업을 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디플랜은 좋은가, 나쁜가?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편집자 주: 다트머스는 Class of 2018부터 AP 크레딧을 인정하지 않는다
Written by Ell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