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
서귀포시 상예동 조간대에 있는 꽤 크고 깊은 조수웅덩이에서 촬영하던 중 흥미로운 광경을 발견했다. 웅덩이 벽에 붙은 굴껍데기 밖으로 삐죽 나온 물고기 얼굴이 보였는데 반대편에는 꼬리 부분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와 꼬리가 일직선에 있지 않고 위아래로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해 보니 머리와 꼬리의 주인이 서로 다른 것이며 결국 두 마리가 하나의 굴껍데기 안에서 번식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 물고기들의 이름은 저울베도라치Entomacrodus stellifer이다.
굴껍데기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는 짙은 회색 바탕에 작은 흰 점무늬가 가득했고 오랑우탄처럼 돌출되고 넓은 입과 소의 뿔 같이 솟은 머리 위 돌기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머리는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였다. 굴 껍데기 뒤로 나온 꼬리는 머리에 비해 크기가 좀 작게 느껴졌으며 무채색에 가까운 머리에 비해서 갈색빛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촬영하다 보니 더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주위에 다른 저울베도라치들이 몇 마리 더 있었는데 꼬리만 보이는 쪽과 비슷한 크기와 색깔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굴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려고 경쟁하는 듯 서로 투닥거리며 싸웠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크기가 작고 갈색을 띤 이 녀석들이 수컷이며 암컷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사무실로 돌아와 벌어진 굴껍데기 속을 촬영한 영상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암수가 반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작고 갈색이 도는 물고기가 알을 낳으면 크고 회색빛의 물고기가 수정시키는 장면이 촬영된 것이다. 암수를 정확히 알고 보니 그들의 생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란은 굴껍데기 말고도 웅덩이 곳곳의 바위 구멍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수컷이 차지하고 있는 둥지에 암컷들이 찾아와 산란을 했다.
어떤 곳에선 암수 한 쌍만 보였지만 수컷 한 마리에 암컷이 두 세 마리 들어있는 굴도 보였고 암컷들이 서로 알을 낳기 위해 둥지 주변에서 경쟁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굴에선 수컷 하나에 암컷은 네 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수컷이 암컷 중 하나의 머리를 큰 입으로 덥석 물어 밖으로 내동댕이 치는 광경도 목격했다.
이런 모습은 그동안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동물들의 암수 역할과는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었다. 알을 낳는 동물 중에는 암컷의 크기가 큰 경우가 많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이 경쟁한다는 것이 일반적 관념인데 이들은 모든 면에서 그와 반대였다.
그 이후로 다양한 물고기들의 습성을 관찰하다 보니 저절로 그들의 그런 습성이 이해되었고 많은 종의 물고기가 저울베도라치와 비슷한 번식 행동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닷속에서 물고기가 알을 낳을 장소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 데나 산란을 하면 금세 다른 동물들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종마다 여러 가지 번식전략을 마련하는데 아주 많은 양을 낳아 일부라도 생존하게 하거나 적은 수를 낳아 부모가 잘 보살피는 것이 대표적이다.
부모 또는 둘 중의 하나가 보살펴야 하는 경우, 둥지의 입지조건이 아주 중요하다. 흰동가리처럼 독이 있는 말미잘 바로 아래 알을 낳는 경우도 있고 많은 경우 접근이 어려운 패류의 껍데기 속이나 돌 아래 또는 바위 구멍 속에 둥지를 마련한다.
그런데 좋은 조건의 둥지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힘이 센 물고기가 차지하게 된다. 만약 암컷이 이 경쟁에 참여한다면 모든 암컷이 자기 알을 낳을 둥지를 각각 장만해야 하므로 너무 심한 경쟁을 치러야 하고 결국 번식에 쏟을 에너지를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수컷이 경쟁을 통해 서열대로 둥지를 차지하면 암컷은 그곳에다 알을 낳는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능력 있는 수컷은 좋은 집을 마련해 많은 암컷을 불러들여 차례로 알을 낳게 하면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어 좋고 암컷들은 그러한 수컷의 둥지에 알을 낳으면 좋은 유전자가 자기 자손에게 전달되고 또 힘센 아빠가 알이 부화할 때까지 잘 보살펴 주므로 새끼들이 무사히 태어날 확률이 높아져 이득이 된다.
산란기 끝물에 물에 들어가 보면 둥지라 하기엔 엉성한 곳에 자리 잡은 수컷들도 보게 된다. 굴이라 할 수도 없는 약간 움푹한 지형에서 얼마 안 되는 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컷 물고기들이 안쓰럽기도 한데 어쩌면 아예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녀석들도 있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생물의 몸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고 생물의 행동양식은 유전자 입장에서 철저히 경제성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조수웅덩이에서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