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댄스 에세이 「폴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살 빠져서 좋아 보인다는 말을 요새 자주 듣고 있다. 폴댄스 때문은 아니고 폴댄스 시작 전부터 헬스를 열심히 해서 빠진 체지방 때문인데, 실은 살이 그렇게 많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키가 작고 가지고 있는 근육의 양이 워낙 적다보니 많이 빼지 않았는데도 살이 빠진 티가 난다.
살이 빠지는 게 예전엔 목표이고 자랑이었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살이 빠지는 게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결혼 전 20대만 하더라도 근육량 보다는 몸무게가 표준 미만인 ‘미용몸무게’를 목표로 매순간을 살아왔다. 중학생 때부터 매점을 사랑했으니 대략 중3과 고1 사이부터 불어난 살을 빼겠다고 다이어트를 했던 것 같다. 적게 먹으며 무리하게 체지방을 빼다가 운동 중 인대가 늘어나 깁스를 한 적도 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근육 4kg가 빠져나갔다.
살이 쪄서 못 입었던 옷들도 이제는 입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쉬운 건 20대 때 미용몸무게에 집착한 탓에 현존하는 근육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무조건적인 마른 몸매보다는 근육 있는 몸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선생님처럼. 그러면 안 되는데 어제도 동작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의 팔근육을 보고 감탄하느라 동작을 배우는데 집중 할 수가 없었다.
폴댄스를 15분 동안 하는 것이 런닝머신 50분 한 효과가 있다고 할 정도로 폴댄스는 전신 근력을 많이 쓰는 운동이다. 유산소와 무산소 모두 포함된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새벽에 운동을 아주 가끔 나가지만, 폴댄스 수업을 하고 난 다음에는 모든 운동의 기준이 폴댄스에 맞춰지게 되었다. 근육통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새벽운동을 피해주거나 근육통을 풀기 위해 집에서 간단하게 스트레칭 정도만 한다. 폴댄스 수업을 들은 이후로는 폴댄스 외에 운동의 강도도 횟수도 많이 줄었다. 폴댄스에 매료가 되었지만 폴이 아픈 건 어찌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폴 때문에 아파서 다른 운동을 못 하겠다.
폴댄스를 하고나면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 근육통이 지속될 때도 있다. 이렇다보니 모든 운동의 기준이 폴댄스에 맞춰지게 된 것이다.
폴을 잘 타기 위해 폴을 쉬어주듯이, 가족에게 나를 맞추기 위해 가족과 있는 시간에서 잠시 물러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쉼과 단련, 그리고 단련과 쉼. 어느덧 나에게 폴댄스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쉼이자, 삶을 잘 살기 위한 단련이 되었다.
“오늘은 다른 걸 해볼 거에요. 맨날 똑같이 폴만 잡으면 재미없으니까.” 선생님이 폴을 가리켰는데 폴에 무언가 걸려있었다. 바로 폴스트랩. 폴에 걸려있으니 흡사 고문 할 때 쓰는 포승줄 같기도 했지만 폴스트랩은 폴 위에서 더 자유롭게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다니 무서우면서 가슴이 설렜다. 폴스트랩, 폴실크, 폴후프. 일반 폴로도 다양한 동작을 배우는 게 재미있지만 이렇게 폴을 활용한 도구들이 있어 더 재밌다. 일반 폴로는 하기 어려운 동작을 폴스트랩을 통해서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손목을 많이 쓰게 되어 손목이 다른 날 보다 아플 수 있다고 한다.
폴스트랩은 하나의 폴에만 달려 있고 오늘 수업은 폴스트랩을 써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수강생들과 시간을 나눠 연습을 해야 하므로 수업시간은 짧아졌다. 폴스트랩은 손목을 많이 쓰므로 웜업으로 손목을 푸는 동작들을 많이 했다. 동작을 배우기에 앞서 다들 한 번 씩 폴 스트랩에 손을 끼워 보았다. 키가 작은 나는 좀 더 까치발을 들어 스트랩을 빠듯하게 잡아야 했다. 폴스트랩이 내 키에 비해 높게 달려 있어서인지 확실히 스트랩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왼손목에는 폴 스트랩을 끼우고 오른손은 어깨높이보다는 높게 폴을 잡는데, 이때 ‘구스넥 그립’이라는 그립을 배웠다. 폴댄스 그립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구스넥 그립은 입문반에서는 가장 많이 쓰는 그립으로 기본이 되는 그립이다. 구스넥 그립은 이름처럼 손목을 거위 목처럼 만든다. 내 반대편에 있는 거울로 보았을 때 손가락만 보이게 잡아야 한다. 구스넥 그립은 높이도 중요하다. 너무 높게 잡아도, 너무 낮게 잡아도 동작이 무너질 수 있다. 자신의 입술 선 정도의 높이로 잡는다. 구스넥 그립으로 한 바퀴를 돌며 본격적인 폴스트랩을 활용한 동작들을 먼저 배웠다. 이번에는 손목을 쓰는 동작들이 많았다.
오늘은 참여한 수강생들 모두가 같은 동작을 배웠다. 그러나 각자의 수준에 맞춰 자연히 진도도 달라졌다. 다들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어려워하긴 했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준 모든 동작을 다 수행하는 수강생들도 있었고, 진도가 안 나가니 동작을 더 쉽게 변형하여 진행되는 수강생들도 있었다. 나는 언제나 대부분 후자에 있다.
폴스트랩을 잡고 폴을 도는 동안 짧지만 다른 생각들은 멈춘다. 나를 화나게 하던 일들도, 독촉하던 마음도 잠깐 동안이지만 폴 위에서는 내려놓는다. 분한 일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분풀이해도 된다. 내가 나에게 쓰는 힘, 결과적으로 그만큼 스스로의 몸을 소모시키고, 스스로가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야 말겠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렇게 동작을 해보고 저렇게 동작을 해보니 하루종일 스트레스 받아 머리에 쏠렸던 열기가 어느덧 전신으로 옮겨가 뜨겁고 땀이 났다. 폴스트랩을 잡았던 손목과 손목 주변 근육들도 욱신거렸고 양 팔뚝도 욱신거렸다. 아, 이게 바로 힘의 전환이구나! 밖으로 향하던 에너지가 내 안으로 향해진다.
“오른발바닥을 폴에 대요. 오른! 발! 발바닥! 발바닥!”
오른발인지, 왼발인지, 발바닥인지 발등인지 이리저리 폴 위에서 발을 허우적거렸다. 그걸 지켜보던 수강생들이 웃었다. 수강생들이 웃을 때 나도 함께 웃었다. 웃으면서도 ‘어떡하지? 어떻게 멈추지? 동작은 어떻게 하지?’ 이미 구동이 안 되고 있는 머리를 애써 굴려보았지만 역시 안 된다. 폴만 돌아가지 머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폴은 내가 버둥거릴 때마다 더 세차게 돌아갔다. 이러다 지구 밖으로 내동댕이 쳐 질 것 같이 어지럽다. 그래도 생명줄 같은 폴스트랩은 꽉잡고 있었다. 수강생들이 웃는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다. 왜냐면 다들 폴 위에서 동작을 배울 때만큼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폴에서 내려와 선생님이 보여주는 동작을 본 이후에야 오른발바닥을 폴에 대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삼각대를 들고 이제 모두 지금까지 연습한 동작들을 촬영하는 시간. 각자 두 번씩 촬영하지만 오늘은 맞춘 듯 세 번 씩 하고 있는걸 보니 다들 폴스트랩에 매료된 듯 보였다. 오늘의 내 폴실력은 한마디로 ‘꽈당’이었다. 폴에서 낙상하고 말았다. 첫 번 째 영상을 촬영할 때도, 두 번 째 영상을 촬영할 때도 동작을 잘 하지 못 하다가 세 번 째 영상을 촬영 할 차례에서 그만 폴에서 낙상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준비한 체력을 모두 소진한 것 같다. 철푸덕 하고 폴에서 떨어진 나를 지켜보던 수강생들과 선생님 모두 깜짝 놀랐다.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졌고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폴낙상에 대해서 폴댄스 수업을 수강하기 전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고 조심 해야겠다 생각만 해두었지 이렇게나 빨리 폴낙상 사고를 당할 거라고 미쳐 생각하지 못 했다. 아무래도 폴이 아닌 폴스트랩을 사용했기 때문에 폴스트랩을 순간적으로 놓치면서 떨어진 것 같다. 웃긴건 낙상 하기 전엔 폴낙상이 무서웠는데, 물론 낙상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해서 폴을 타야겠지만, 막상 떨어지고 나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폴을 타다 다치는 경우는 입문반에서는 거의 없다고 한다.
수업을 마치고 현관에서 선생님에게 인사하는데 선생님이 나가는 나를 잡으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폴스트랩이 다른 분들에 비해 높게 있었잖아요.” 폴에서 떨어질 때는 솔직히 창피했는데 그건 창피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애를 쓰다 생긴 작은 일화일 뿐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평균이라는 게 있었다. 키 150도 안 되는 작은 체구. 그간 살아가는데 불편 없이 살았다고 여겨왔지만, 실은 세상의 모든 표준들에 나를 맞추고 사느라 고생이 고생인줄 모르고, 노력이 노력인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그걸 창피하게 여길 필요도 없고, 자책할 일도 아니다. 남들 보다 더 노력하며 살았던게 억울하기 보다 장하고 보람찬 일이었다고 오늘만큼은 나를 칭찬해주기로 했다.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나 작다! 짧다!
폴은 몸을 단련하기도 하면서 마음도 단련해주는구나. 내게는 폴수업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수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매수업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낯설고 뭉클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딸들에게 오늘 폴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어디, 어디, 봐봐.” 첫째 아이는 엄마의 몸개그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관심 없던 남편도 폴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더니 자기도 영상을 보여 달라고 했다. 떨어지는 장면에서 첫째 아이는 몸개그라도 본 것처럼 웃더니 다른 영상들도 보여 달라고 했다. 엄마의 폴실력을 본 첫째 아이는 멋있다고 다음에도 보여달라고 했다. 그 후로도 가끔 첫째에게 폴댄스 영상을 보여준다. 아직 학교도 안 다니는 어린 녀석이 동작의 예쁜 구간을 알아차리고 “예쁘다”, “멋지다” 칭찬해준다. 자기도 타고 싶다고 언제쯤 자기도 할 수 있는거냐고 자꾸 묻는다.
다음날 일어났는데 넘어진 쪽이 조금 욱신거렸다. 몸이 아픈 것이 폴을 타서 그런 건지 폴에서 떨어져서 그런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폴을 타서도 아픈 것이고, 넘어져서도 아픈 것이었다. 폴을 타서 아픈 근육들은 며칠 지나고 나니 금방 괜찮아졌고, 넘어져서 아픈 곳은 근육이 아닌 부위들이 나아질 기미없이 며칠 내리 그냥 아팠다. 잠깐만, 이걸 구분하고 있는 내가 너무 신기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