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에게 엄격하며 단호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된 글...
오늘도 나는 첫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사춘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아이의 눈빛은 차갑거나 촛점이 없기 마련인데,
나는 또 어리석게도 아이의 도발에 넘어가고 만것이다.
도발이랄 것도 없었다.
사춘기 아이에게 예의를 묻는 나는 화를 오늘 내고 싶었다는 욕구에 충실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왜 첫째에게 이렇게 유연하지 못한걸까?
예의와 버릇없다는 잣대는 조금 더 길어도 되지 않을까?
왜 나는 이렇게 첫째에게 엄격하게 된걸까?
첫째는 예측되지 않은 무경험에서 시작된다.
부모에게 첫째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첫번째 경험이기 때문이다.
말이 안되게 약한 육체를 갖고 태어난 새 생명은
이정도 컨디션에 아프다고? 를 연발할 만큼 자주 그리고 길게 아프다.
아이를 낳고 난 다음의 모든 상황은 심약한 내가 견디기 어려운 일 들이었다.
나의 잘못이 이처럼 작고 귀한 아이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나의 당황과 허둥은 여과없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
부모의 불안을 다이렉트로 전달받은 첫째는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학습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호한 상황에서 당황을 연발할 수 밖에 없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내 속에서 나온 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타인에게서 나를 찾는다.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나만의 특징을
내가 낳은 아이에게서 찾는 것은 본능일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본능이라면,
나의 약점과 단점을 찾아 고치려 하는 것 역시 본능일 지도 모른다.
내 삶에서 수정되었다면, 강화되었다면 달라졌을 수많은 기회들이 뇌에서는 셈이 되고
그것은 행동이라는 형태로 아이에게 전달된다.
너만큼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어.
나의 인생에 결론을 타인의 인생에 넣으려는 순간 마찰은 발생한다.
매일이 새것인 아이는 자기의 특징을 이미 겪어본 타인에게 전달받고 해석당한다.
특징과 성향이 어떤 것임을 스스로 생각하기도 전에
부모의 노골적인 가치관으로 자기만의 본성에 긍정과 부정을 표시한다.
발달을 몸과 마음이 해가는 시기에 자기에게 표식된 본성을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호르몬의 영향이든 뇌의 발달이든.
아이가 저항을 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본성에 스스로 긍정과 부정의 표식을 다시 한다는 것과 같다.
부모의 가치관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관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이의 사춘지시절 저항은
그간 내가 잘 키웠다는 지표로도 사용할 수 있다.
스스로의 가치관을 갖을 만큼의 배포와 용기 그리고 울타리를 제공한 셈이니 말이다.
기어이 뜨거운 걸 만져봐야 뜨겁다는 걸 알아 만지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또 다른 형태의 뜨거움을 만지려 하는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 만져봐야 뜨거움의 정도를 알 수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의 메뉴얼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만져보려하고 알았던 모든 과정을 삶이 기억할 것이다.
시도와 경험, 그를 통해 겪었던 모든 감정 역시 뜨거운 것에 손을 뻗어본 자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째는 특별하다.
처음인 부모를 첫째는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나의 잘못에 매일 용서하며 웃으며 다가왔던 아이에게 이제는 내가 보답할 차례이다.
아이의 잘못에 매일 용서하고 웃으며 다가갈 차례는 이번엔 나의 것이다.
첫째와 함께한 나의 모든 첫번째 순간들.
어리숙해서 사랑스럽고 그래서 아픈 순간이 많았던 나의 아이.
첫째에게 엄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늘 기억한다면
어떠한 도발에도 조금은 여유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하나마나한 다짐을 한다.
그 다짐이 모여 삶의 방향이 조금은 달라지길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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